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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Apr 22. 2021

그쪽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만

그러면서 이십 년


2001년 봄이었다. 


일주일 동안 미루었던 빨래와 집 청소를 하던 참에 친구 현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방구석에서 총각 냄새 숙성시키지 말고 빨리 명동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일요일에 외출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그날은 날씨가 좋아서였을까, 흔쾌히 그러마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약속한 두 시에 맞춰 종로 3가의 커피숍에 도착했다. 현기가 나를 보더니 먼저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옆 자리에 웬 낯선 아가씨가 함께였다. 현기 부인의 얼굴은 내가 아는데 이 아가씨는 누구지? 현기가 내 궁금증을 금방 풀어주었다.


“서로 인사해라. 이 쪽은 내 처제다. 여기는 지난번에 말했던, 내 중학교 동창이고.”


중매나 맞선이라면 고리타분하니, 그저 소개팅이라 생각하란다. 


아, 예 하면서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녀는, 첫인상부터 ‘아니올시다’였다. 노랗고 빨갛게 물들인 머리하며, 도대체 몇 개를 박은 거야 싶은 피어싱, 길바닥 청소라도 할 기세인 질질 끌리는 청바지, 그리고 잘그랑잘그랑 소리를 내는 체인까지. 뭐 그다지 못난 얼굴은 아니다 싶었지만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리를 마련한 현기의 체면도 있으니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다가 빨리 돌아가야겠다 싶었다. 


정해진 각본대로 현기가 먼저 일어서자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맥주나 한 잔 하러 가죠.”


그녀를 따라 나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숍에서 머지않은 곳에 호프집이 있었다. 내겐 묻지도 않고 생맥주 삼천 씨씨와 오징어를 주문한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죠? 사실 아저씨도 내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맥주나 마시고 헤어져요. 내가 살게요.”


뭐어? 아저씨?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쳇! 그런데 맥주를 마시자는 것도, 속내를 말하는 것도 항상 그녀가 먼저였다. 첫 건배를 한 때가 오후 세시쯤이었을 거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계속 술을 마셨다. 상대방이 내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으니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했다. 마음을 비운 탓에 쓸데없는 눈치도 필요없었다. 그런 까닭에 나와 그녀, 우리의 대화는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맥주의 맛에서부터 우주의 신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참으로 다이나믹하고 유니버셜했다.


가게를 나서던 그날 밤 열 시,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고 그녀는 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날이 2001년 4월 22일, 이십 년 전 바로 오늘이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기념일보다 ‘처음 만난 날’에 조금 더 의미를 두고 산다. 결혼보다 앞서는, 말 그대로 우리의 ‘처음’이기 때문이다. 


“아빠 엄마는 그 날, 왜 결혼하기로 결정하신 거예요?” 


아들이 타이밍을 잘 맞춰서 아주 훌륭한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나는 너희 엄마 아니면 안 되겠다 싶었지.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은.” 기분 좋으라고 한 말에 아내도 즉시 말을 받는다. “맞아. 나도 나 아니면 안 되겠다 싶었지. 너희 아빠를 구원해 줄 사람은. 어찌나 촌스럽고 늙어 보이던지.” 


서로 비슷한 내용인데 왠지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은, 찜찜한 대화다. 하여튼.


이십 주년 기념일을 대하는 아내의 자세


벌써 이십 년이 지나갔다. 앞으로 이십 년 동안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궁금해진다. 일흔 살이 되면 우리 부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랑의 '관성'을 믿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7,306일을 사랑하며 살았으니, 앞으로의 7,306일도 지금까지처럼 그저 사랑하며 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 날 이랬더라면’ 또는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이런 따위의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자. 아무런 의미 없는 상상이며, 부부 싸움이 끝난 뒤에 되새겨보면 스스로를 그저 창피하게 만드는, 나만 아는 자책골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저 '천생연분'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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