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불라불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May 02. 2021

돌아가신 할머니가 내 꿈속에

이십 년 만의 일입니다


12년 동안 치매를 앓으셨던 할머니는 부산 집의 작은 방에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벽지를 뜯어내서 이건 개나리꽃, 장판을 말아 올려서 이건 살구꽃 그러시며 말년을 보내셨다. 그렇게 당신 혼자 열두 해를 꽃밭 속에서 노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제대로 된 유언도 없이 세상과 작별하셨다. 그리고 고향 마을 뒷동산에 꾸며진 진짜 꽃밭에 할아버지와 나란히 누우셨다. 그것이 2001년, 그러니까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다.


https://brunch.co.kr/@jay147/10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동안 꽤나 힘들어하셨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계속 걱정하게 만들었던 일은 뜻밖에도, '할머니가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몇 해 뒤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장례를 치른 지 사흘 만에 현몽現夢을 하셔서 두 분을 안심시켰다는데, 그보다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는 스무 해가 다되도록 꿈에 나오지 않으시니, 그로 인한 아버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그거 근거 없는 이야기예요. 생각을 많이 하시니까 그냥 꿈에 보이는 거라구요.”

“그런 소리 마라. 그럼 외할머니만 생각하고 너희 할머니 생각은 안 했단 소리냐?”


아버지의 염려는 꼬리를 물었다. 혹시나 묘墓를 잘못 쓴 것은 아닌지, 아니면 무언가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옳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하나하나 되짚으셨다. 그것은 삼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먼저 현몽을 한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속히 연락하기로 약속까지 했을까. 하여튼 할머니가 그 누구의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십 년에 걸친 아버지의 고민이었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도 어젯밤 내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신 것이다. 




푸른 잔디가 넓게 펼쳐진 고향 마을 뒷동산이었다. 내가 들꽃을 꺾어 놀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하얀 나비였다. 나는 곧 나비를 좇았다. 갑자기 하얀 안개가 덮였다. 길을 잃어 두리번거리는데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더니 그곳에 우리 할머니가 서 계신 것이었다. 평소 입으시던 고운 한복 차림이었다. 백발로 돌아가셨으나 쪽진 머리에서는 검은 결이 빛났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할머니’하고 달려갔다. 할머니가 활짝 웃으시면서 내게 손을 흔드셨다. 할머니가 손을 흔들 때마다 한복 소매 깃 안에서 하얀 나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다시 한번 더 ‘할머니’하고 외치며 그 품에 안기려는 찰나!


시계를 보았다. 아침 여섯 시가 채 되지 않았다. 부산의 아버지께 바로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가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무슨 일이고, 이 새벽에?” 나는 할머니가 꿈에 나왔다는 것과, 꿈에서 본 장면들을 그대로 말씀드렸다. 그리고 잠에서 깨자마자 곧장 전화드린 거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으시다가 “그래, 알았다. 이제 됐다.”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꿈속에서 본 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오전 내도록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신의 아들, 며느리를 놔두고 왜 하필 손자인 내 꿈에 나타나신 걸까? 내가 우연히 할머니 꿈을 꾼 걸까, 아니면 할머니가 말 그대로 나를 지목해서 현몽하신 것일까? 하긴, 할머니는 돌아가신 뒤로도 딱 세 번 내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이번에 내 꿈을 찾아오신 것도 전혀 뜬금없는 일은 아닐 게다. 어쩌면 진짜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오신 것일까?


그래서 이제,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를 구해 주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전부 듣고 나면, 할머니가 하필이면 내 꿈에 다녀가신 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었을 거라는 내 생각에 혹시나 공감해 주실 지도 모르겠다.



PS. 불라불라不拏不拏 - 굳이 잡거나 담아둘 필요 없는, 그저 가벼운 이야기들만 남겨두는 곳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