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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y 03. 2021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를 살렸다 (1)

아직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

https://brunch.co.kr/@jay147/72


사흘 간의 할머니 장례를 마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꽤나 늦은 시각이었다. 그냥 하루를 더 자고 서울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부모님은 걱정하셨지만, 회사의 급한 일을 미뤄두고 온 터라 다음날은 반드시 정상 출근을 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잠은 버스에서 자면 된다고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린 다음,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남해南海의 장지葬地까지 함께 다녀온 초등학교 친구 영주가 또 나를 배웅하겠다며 터미널까지 따라왔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평일치고는 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시간은 이미 밤 열 시. 그리고, 매표소 위 전광판에는 자정, 그러니까 열두 시에 출발하는 버스의 좌석을 지금 판매하고 있다는 안내 문구가 떴다. 그 이전 시각의 출발 편은 이미 매진이 된 것이다. 


조금은 조바심이 났다. 서 있는 사람을 눈대중으로 헤아려 본 영주가, 열두 시 출발 편은 어렵겠지만 열두 시 삼십 분 버스는 여유있게 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만일 버스를 놓치면 어떻게 하지? 내 걱정을 눈치챈 영주가, 그럴 경우엔 자기가 서울까지 나를 업고 가겠노라 허풍을 떨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툭툭 쳤다. 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키는 대략 170 정도 되었을까? 회색 개량 한복 차림의, 얼굴이 아주 작은 사람이었다. 남자가 대뜸 내게 말했다. “혹시 서울 가는 버스표 끊으려고 기다리시는 겁니까?”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남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서울 가는 버스표입니다. 열 시 삼십 분에 출발하는 버스입니다. 지금 가시면 바로 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왜 제게?”  

“아, 제가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못 가게 되었습니다. 환불을 하려다가 선생님께 파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습니다. 이 표를 받으시고, 요금은 그냥 제게 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옆에 섰던 영주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 양반이, 지금 누구한테 장난을 칠라카노? 경찰 부를까요?” 꽤나 무례한 말이었지만 남자는 웃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시면 제가 여기 있을 테니 선생님께서 이 표를 직접 확인해 오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영주가 나를 쳐다보았다. 하긴 그러면 되겠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영주가 잰걸음으로 돌아왔다. "이거, 정상적인 표 맞단다." 그러면서 영주가 그 남자에게 다시 말했다. “아이고, 아저씨. 미안합니다. 가짜표 장사가 하도 많아서.” 남자는 괜찮다고 웃으면서, 내가 건넨 돈을 받더니 갑자기 합장을 하고는 사람들 사이로 이내 사라져 버렸다.


정말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 어쨌거나 열두 시 삼십 분 표도 아슬아슬했던 참에, 훨씬 빠른 시각에 출발할 수 있게 되어 진짜 다행이라며 영주와 나는 서둘러 탑승구로 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그때까지 참았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영주가 창 밖에서 손 흔드는 것을 보다가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강남 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새벽 두 시 반이 지났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씻는 둥 마는 둥, 나는 모자란 잠을 다시 청했다.




다음날 아침 나를 깨운 건, 다름 아닌 영주의 전화였다. 


어젯밤 강남 터미널에 내려서는 분명히 잘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기도 전에 다급한 영주의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 제이야, 뉴스 봤나?

- 무슨 뉴스?

- 어젯밤 열두 시 삼십 분 버스, 그게 고속도로에서 뒤집혀서 승객이 넷이나 죽고, 수십 명이 다쳤단다.

- 열두 시 삼십 분 버스? 그게 뭔데?

- 이 바보야, 니가 원래 타려고 했던 그 버스 말이다. 표 끊으려고 줄 서있던, 열두 시 반 버스. 생각 안 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그리고 등골이 오싹했다. 서둘러 TV를 켜서 뉴스를 찾았다. 영주의 말이 맞았다. 이럴 수가.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참고 출근한 다음, 업무를 대충 정리하고 나서 서둘러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일을 모두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뒤에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그러셨다.


“그건, 할머니가 너를 구해주신 거, 아니겠나?”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주는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만일 12시 30분 버스를 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남자는 왜 하필, 맨 앞도 제일 끝도 아닌 중간 즈음에 서 있던 내게 다가온 것일까? 가짜 표로 사기를 칠 작정도 아니었는데, 유독 내가 그의 눈에 띈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아버지의 말씀대로, 할머니가 나를 보살펴서 그랬던 것일까? 


그런데 그런 일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듬해에는 더욱 신기한 일이 또 내게 일어나게 된다.



PS. 불라불라不拏不拏 - 굳이 잡거나 담아둘 필요 없는, 그저 가벼운 이야기들만 남겨두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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