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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y 04. 2021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를 살렸다 (2)

여전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


https://brunch.co.kr/@jay147/73


사무실은 서초동, 집은 죽전이었다. 


강남역에서 뱅뱅 사거리까지 가는데도 택시를 탈 만큼 지독한 길치였던 나는, 퇴근 때에도 늘 다니던 길로만 다녔다. 서초동, 양재동, 분당 내곡간 고속화 도로, 그리고, 분당 수서간 고속화 도로. 그 순서대로 쭈욱 가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리 집이 거기에 있었다. 제일 빠른 길이기도 했고, 또 그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 날은 퇴근이 조금 늦었다. 밤 열 시쯤 되었던 것 같다.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 안에서의 루틴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시동을 걸고, 벨트를 매고, 스위치를 눌러 조용필을 틀었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두어 소절을 따라 부르다가 그리고 출발했다.


열 시가 지난 탓에 막힘 없이 시원하게 달릴 수 있었다. 속도는 대략 90Km 정도였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조금 더 크게 노래를 불렀다.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저 평소와 같았다. 길도, 차도, 그리고 나도. 그런데, 수내동의 한국 잡월드 근처를 지나던 그때,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차의 속도가 뚝 떨어진 것이다. 여태 시속 80~90Km로 잘 달려오던 차가 난데없이 40Km로 감속이 되어버렸다. 나는 당황했다. 혹시 주차 브레이크를 건드렸나? 아니다. 연료가?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이 문제인 거지? 당시, 회사에는 차량을 관리하는 직원이 따로 있었다. 심지어 그 날은 임원들의 차량을 정기 점검한 날이기도 했다. 내 차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지?


가속 페달을 밟으면 부우웅 소리만 날 뿐, 속도는 그대로였다. 발을 떼면 40Km의 속도가 유지되었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당연히 감속되었다가, 발을 떼면 다시 속도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40 이상으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속도 고정 기능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차를 잡아당기는, 그런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내 뒤를 따르던 차들이 상향등을 번쩍거렸다. 우선 비상등을 켰다. 창을 내려 앞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비상등을 켠 채 그저 40Km의 속도로 2차선을 천천히 달리는 사이, 저만치 금곡동 고가 도로가 나타났다. 조금만 더 가면 이제 집이다. 대략 백여 미터 앞 즈음에 빨간 마티즈 한 대가 보였다. 뒤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이 조금 더 세게 느껴진다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스포티지 한대가 쇠 긁는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나를 지나가더니 2차선을 달리던 마티즈를 인정사정없이 들이받아 버리는 것이었다. 귀를 찢을 듯한 콰쾅 소리가 났다.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스포티지는 중앙 분리대 벽을 긁으며 몇십 미터를 더 가더니 겨우 멈추었다. 흰 연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마티즈는 전복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내 눈 앞에서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고가 났던 자리


나는 차를 멈추고 시동을 껐다. 재빨리 달려갔다. 전복된 마티즈가 우선이었다. 운전석 안에는 남자 하나가 간신히 운전대를 잡고 버티고 있었다. 손잡이를 당기니 문이 툭 열렸다. 그 바람에 남자가 와락 쏟아지듯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겨우 일어섰다. 안 다치셨습니까? 남자가 대답 대신 어깨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곧 스포티지로 달려갔다. 중년 남자였다. 에어백이 터져 있었다. 여보세요, 괜찮으세요? 아니오. 에어백에 고개를 파묻은 남자가 힘겹게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서둘러 경찰과 119에 신고를 했다. 이마로,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구급차와 견인차가 떠나고, 대략 마무리가 되었다. 출동한 경찰에게 블랙박스의 메모리 카드를 건네주었다. 경찰이 고맙다고 했다. 내 인적 사항을 받아 적던 경찰이 내게 그랬다. “이 구간이 문제입니다. 해마다 이런 사고들이 뜬금없이 일어난다니까요.”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겨우 끝났구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사람이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 차에 이상이 없어서 정상적으로 달렸다면, 그랬더라면 어쩌면... 에이, 재수 없는 생각. 곧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김대리에게 차량 점검을 꼭 맡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시동을 걸었다. 부릉. 그리고, 천천히 출발했다. 그런데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차의 속도계가 이번엔 가볍게 40Km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밟아도 꿈쩍 않던 차가, 마치 언제 그랬나는 듯 이전처럼 치고 나가는 것이었다. 이게 나를 놀려? 별의별 일을 하루에 모두 겪는구나. 아내에게 해 줄 이야기가 많이 생겼다 싶었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정말 힘든 하루였다. 시동을 끄고 내리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네, 아버지. 늦은 시각에 웬일이세요?"

"그래, 내일 부산 올 거냐?"

"부산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바쁘니까 깜빡했나 보구나. 내일이 할머니 제사잖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얼핏 스쳤기 때문이었다.


(3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PS. 불라불라不拏不拏 - 굳이 잡거나 담아둘 필요 없는, 그저 가벼운 이야기들만 남겨두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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