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로언치浮路言致
곽 하오. 조선 중종 때의 학자(1492~1547).
성은 곽郭, 이름은 하오河午, 자字는 다음多音, 호號는 가독加讀, 본관은 제주濟州. 세간世間에 떠도는 말들을 모아 ‘부로언치浮路言致’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매거진每去盡’, ‘부론치북不論治北’ 등을 저술하였으나 왜란倭亂 때 모두 소실燒失되었고, 그중 일부一部만이 구전口傳의 형태形態로 오늘에 이른다.
중종 14年, 경기京畿 이천利川 땅에 토옹土翁이 살았다. 그의 이름을 정확正確히 아는 자者 없으나, 토굴을 짓고 사는 늙은이라 하여 그저 토옹土翁이라 불렀다. 한편으로는, 언덕 아래 산다 하여 그를 일러 배내토옹坏內土翁이라 칭하는 이도 있었다.
(坏 : 언덕 배 翁 : 늙은이 옹)
토옹土翁의 가진 재주, 여럿이었으나 그중 으뜸이 피혁皮革 다듬고 의복衣服 만드는 것이었다. 기술技術이 출중出衆하여 명성名聲이 자자藉藉하니, 한양漢陽 부인婦人 중中 토옹土翁의 옷을 입지 않은 자者 없었고, 평양平壤 기녀妓女 중中 토옹土翁의 가죽신 신지 않은 자者 없었다.
모일某日, 임금께서 새 의복衣服과 새 신을 찾으시니, 가독加讀 대감, 급히 동자童子를 보내 토옹土翁을 대령待令하게 하였다. 토옹土翁이 갖은 재주를 부려 서둘러 진상進上하니, 임금께서 보시기에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크게 기뻐하시며 토옹土翁에 이르시기를, “그대의 솜씨 천하제일天下第一이나, 조선에만 두어 사용함이 적절適切치 않도다.” 하시니, 토옹土翁, 엎드려 절하며 고告하되, “소인, 감읍感泣하나이다. 어명御命을 받들어 분골쇄신粉骨碎身하겠나이다.” 하였다.
마침 서역西域에서 하례賀禮하고자 당도當到한 상인商人들이 있어, 임금께서 친히 토옹土翁을 소개하시자 상인들 크게 기뻐하며 어명御命을 따랐다. 토옹土翁, 이레 후에 상인들과 동행同行하여 고향을 떠나게 됨에 그 착잡함 무엇에 비하리오. 그때 토옹土翁이 남긴 시詩가 아직도 후세後世에 전傳하고 있음이니, 시제詩題는 애이시밀난愛而猜密難(사랑하여 헤어짐을 참기 어려움)이다.
이역만리異域萬里 낯선 곳에 정착定着하였음에도 토옹土翁, 기술연마技術硏磨와 제품발표製品發表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곧 유명有名을 얻는 것은 찰나刹那의 문제였다. 주야불문晝夜不問 노력하며 기술을 갈고닦음이니, 서역인西域人들이 토옹土翁을 일러 루치아노淚恥雅努(눈물이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노력)라고 하였다.
배내토옹坏內土翁은 후일後日 스스로 로마勞磨 배씨坏氏의 시조始祖가 되어 많은 후손後孫을 두었다. 지금도 그의 후손後孫들은 토옹土翁이 서역西域에 처음 정착했던 11월 11일을 배배로대이坏培勞大利로 정하여 그를 추억追憶하고 있음이다. 배배로대이坏培勞大利라 함은, 배내토옹坏內土翁이 갑절 이상의 노력勞力으로 모두를 크게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그때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배내통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자 작퉁作佟, 앞으로 나아가 예禮를 갖추어 말하되, “소인, 불가리不可里, 구치久齒, 몽불랑夢不浪, 배루사체培陋舍體, 입생로랑入生路浪, 푸라다䬌羅多 등도 익히 알고 있나이다.” 이에 스승이 크게 탄복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내, 너의 명품 생활, 미처 몰랐던가? 어익후, 그러고 보니 다음 주가 내 생일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