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드시고 ‘송가인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퍽 하더니' 텔레비전이 안 나온다고 하신다. 화면은 어떤 상태인지, 전원을 껐다가 켜도 그대로인지, 혹시나 선은 제대로 꽂혔는지 여쭤보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구입 연도를 되짚었다. 역시나 그 정도 지났으면 수명이 얼추 다 되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을 새로 사 드릴 테니, 불편하더라도 며칠간만 참으시라 아버지께 다시 말씀드렸다.
주말에 모임이 있어 부산을 들렀다. 주문한 텔레비전이 마침 화요일 오후에 도착할 거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다행이다 싶었다. 아무리 기사가 직접 설치하고 자세히 설명해 드린다 하더라도, 연세 드신 부모님들이 낯선 기계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 정도 머물면서 두 분께 작동법을 가르쳐 드리기로 했다.
부모님은 외출하시고 나 혼자 집에 있었다. 세 시에 벨이 울렸다. 두 명의 기사가 커다란 텔레비전 박스를 들고 서 있었다. 큰 소리로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더니, 현관으로 들어와서는 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기존의 텔레비전을 치우고, 순식간에 새 것을 설치했다. 위치를 정해 균형을 잡은 다음, 기본 세팅을 하는 내내, 기사들은 내게 이것저것 조곤조곤 설명을 해 주었다.
그들은 참 친절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들의 눈가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귀찮을 법도 한 내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정성을 다해 답을 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음료수를 권했더니, 목이 말랐던지 단숨에 마시고는 깍듯한 인사 또한 잊지 않았다.
연세 드신 부모님 두 분만 사시기 때문에, 가전제품 고장이 가장 염려된다 했더니, 대뜸 자기 명함을 주면서, 필요할 땐 언제든 바로 연락 주시라 내게 다짐을 받는 것이었다. 역시 웃는 얼굴로 말이다. 풀어헤쳤던 상자들을 정리하고 현관을 나갈 때, 기사가 그랬다. “어르신들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순간, 갑자기 뭉클했다.
그가 주고 간 명함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어르신들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친절이 미덕이며 친절이 지상 과제인 시대다. 친절이 모든 평가에 앞서는 기준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식당도 친절, 호텔도 친절, 택시도 친절, 심지어 병원도 친절해야 된다. 친절 여부가 재선택의 기준이 되고 경쟁의 지표가 되고, 나아가 존립의 근거가 된다. 맛은 없어도 되지만 친절해야 된다. 시설은 형편없어도 우선 친절하면 커버가 된다. 병은 못 고치더라도 엄청 친절하면, 그나마 양해가 된다.
그래서 저마다 기를 쓰고 교육을 한다. 친절합시다. 친절해야죠. 친절하게 해라. 친절하게 해! 야, 너 친절 안 할래? 죽고 싶어? 그러다 보니 때론 커피가 ‘나오시기’도 하고, 거스름돈이 존대를 받기도 한다. 이른바 과잉 친절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역설이다. 친절은 넘치는데 진짜 친절은 없다. 친절한 척은 하는데 진심을 담은 친절을 만나기는 정말 어렵다.
그 구별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뜻한 말 한마디다. 마음은, 가르친다고 해서 쉽게 따라 할 수도 없고, 배우겠다고 해서 쉽게 알려줄 수도 없다. 그래서 ‘진심으로’는 어렵고,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는 더욱 어렵다. 스스로 차고 넘쳐서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진심, 그리고 그것이 담긴 말 한마디. 그걸 만난 오늘, 그래서 오늘은 기분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