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지나 한밤중에 걸려오는 전화는 둘 중에 하나이다. 술의 힘으로우정을 재확인하려는 뜬금없는 오랜 친구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나이를 새삼 깨닫게 하는 지인들의 갑작스러운 부고訃告이거나. 전자前者는 상습범이 많으니 이젠 어느 정도 대처 요령마저 생겼건만, 후자後者의 경우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숨이 턱 막히고 손이 서두는 것이, 좀처럼 익숙해질 재간이 없다. 지난주 26일, 수요일 새벽의 연락은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내게는 낯선, 후자였다.
철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산시 동래구 아시아드 장례식장.
날이 밝기를 기다려 지인들에게 서둘러 소식을 전했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선약先約을 다음으로 미루느라 나름 정신이 없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난 다음에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오래간만에 꺼내 입은 검은 양복이 왠지 어색하기만 했다. 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고 창 밖을 보니 구름 사이로 어린 시절이 어슴프레 떠올랐다.
철이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처음 만나 내리 삼 년을 같은 반에서 함께 지냈다.
학력고사를 치던 날, 2교시 수학을 망쳤다며 남은 과목은 그냥 포기하고 같이 재수하자던 녀석을 억지로 달래서 시험을 마저 치르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철이는 동아리 동기와 결혼을 했고, 내가 그 결혼식의 사회를 보았다. 나의 생활 기반이 서울로 바뀐 뒤에도 출장이든 휴가든 부산을 다녀오는 길엔, 철이를 잠시라도 보고 왔다. 단짝이라 불러도 좋고, 절친이라 불러도 좋은 사이로, 그렇게 삼십 년을 보냈다.
코로나 시국의 장례식장은 예상대로 조용했다. 큰 회사는 큰 회사대로, 작은 회사는 작은 회사대로 한 두어 명만 보내서 조문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오래 머물다 가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아버님이 외동이셨기 때문에 친척이 많이 없다고 했다. 어머님 쪽의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면 오가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은 장례였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친구들 열두어 명은 사흘 내도록 장례식장을 지켰다. 일부러 더 웃고 더 크게 떠들어야 했다. 철이는 드문드문 찾아오는 조문객들을 맞이하며 소리 내서 울다가, 또 우리가 있는 자리로 와선 소리 내서 웃었다. 어릴 땐 그저 낯설었던 그 눈물과 웃음의 반복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영정 속의 아버님은 변함없이 인자한 웃음을 짓고 계셨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때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이 학년, 아마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뜻밖에도 가출을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을 한 가출이었으나 준비는 시원찮았다. 주머니엔 달랑 차비 밖에 없었으니 갈 곳이라곤 결국 철이 집 밖에 없었다. 함께 시험공부하러 왔다고 둘러댄 철이 덕분에 용케도 그날 밤 잘 곳을 구한 셈이었지만, 우리가 두런거리는 소리를 아버님이 밖에서 들으셨던 듯했다.
내 아버지가 아닌 다른 어른에게 술잔을 받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버님은 철이와 나를 앉혀두시고 꽤나 오랫동안 말씀을 하셨다. 절반은 꾸지람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야단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은 다른 것도 섞여 있었는데, 그것은 내 본성이 착하니 결국은 어른들 말씀을 어기지 않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실상 타이름이었다.
철이 집에서 하루를 자고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호된 야단을 처음부터 각오했지만 엄마도, 아버지도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철이 아버님이 집에 전화를 걸어서 자조치종을 미리 설명하셨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어머님이 그날 술안주로 내어 주신 것은 숭어회였다. 인삼이 유명하다 해서 삼시세끼 밥상에 인삼이 오르지는 않듯, 회로 유명한 부산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회를 먹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님의 야단을 들어가면서도 한 점 두 점 슬쩍슬쩍 집어먹는 숭어가 그렇게 고소하고 맛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야단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을까.
이후로 해마다 봄이면, 그리고 숭어회를 먹을 때면 항상 그 야단자리가 떠올랐다. 어설픈 가출의 짧은 기억, 그리고 철이 아버님의 따뜻한 배려, 그 따뜻함이 고소함으로 남아 입 언저리를 맴돌았고 금세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숭어는 내 입과 혀가 아닌, 내 머리와 내 마음이 기억하는 맛이 된 것이다.
사흘 째 되는 28일 금요일 아침, 나와 친구들이 운구運柩를 맡았다. 몇 걸음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버님의 생전의 모습과 아버님의 말소리가 토박토박 앞길에 박혔다. 오전에 영락 공원에서 화장을 마치고 오후에 부산시민추모공원으로 모셨다. 철이와 유가족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에도 한참을 혼자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난 주말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어제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바뀐 일정을 다시 조율했고, 외출해서 차도 마셨다. 그리고 아내와의 대화 중에 이제는 조금씩 내 차례가 되고 있다는 말도 했다. 피할 방법은 없다. 내 순서다, 내 차례가 되었다 싶으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장인을 먼저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아내가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조금 전에 철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장례 도와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사흘간 장례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철이가 덧붙였다.
“다음 주 즈음 내려와라. 숭어가 제철이다.”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장례 사흘 동안은 멀쩡했었는데, 숭어가 제철이란다, 겨우 그 말 한마디에 말이다. 철이가 그 때를 기억해서 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우선, 내려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아버님을 한번 더 추억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에겐 꽤나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