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맛 라면에 청양고추 반 개. 신묘한 레시피.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매운 것은 닭볶음탕이었다. 보통 닭볶음탕이 그렇게 매운 음식은 아니지만, 그 닭볶음탕은 경기도 이천의 한 고등학교 숙직실에 계신 괄괄하신 기사님의 수제 닭볶음탕이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몇몇이 학생들 없는 학교에 있었고, 또 그날따라 숙직 기사께서 밥을 직접 해 드셨고, 그날따라 메뉴가 닭볶음탕이었는데, 그날따라 기사님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그 닭볶음탕이 지금까지 내가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매웠다는 것이 확실한 게, 그걸 먹으면서 경험한 증상을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닭볶음탕보다 색깔이 과하게 빨갰다는 점을 제외하곤 다른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먹으면서 곧 코에 땀이 맺히더니 이마에도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큰 거부감이 없었는데 너무나도 확실한 매운맛이 흰밥과 같이 먹었는데도 분명했다. 어질어질한 매운맛. 그러다가 귀가 멍멍해졌다. 진짜 매운 걸 먹으면 귀가 멍멍해지는구나. 맛이 몸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는 걸 그때 알았다. 신기하게도 뒤탈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숙직실의 눅눅한 풍경, 빨간 닭볶음탕, 벌게진 얼굴들과 멍멍한 귀의 느낌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 두 세장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매운맛이 많은 이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시대다. 무엇이라도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이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때론 기대와는 다르게 입과 혀를 짓누르는 기분 나쁜 매운맛이나 쓰라린 뒤끝을 남기는 매운맛에 뺨을 맞고 섭섭함을 넘은 원망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떤 음식점에서는 메뉴판에 그려진 빨간 고추 개수로 음식의 매운 정도를 알려주거나, 원하는 정도로 조절해서 내주기도 한다. 때로 매운맛에 도전하는 호탕한 이들을 위해 도전 과제로 매운맛을 활용하기도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매운맛이 사실은 맛이라기보다는 통각 즉, 고통이라는 점을 머리로 매우 잘 이해하고 있는 T(MBTI의 T)에 해당한다. 음식 먹는데, 괴로움과 싸우면서 굳이 그래야 하나 하는 쪽인 것이다. 그렇지만 매운맛이 내 안의 어떤 아쉬움을 채워주기도 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매운맛에 대한 생각이 글까지 오게 된 것은 요 며칠간 칼칼한 맛에 대해 관심이 더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슴슴한 걸 좋아하는 편이고, 아내는 매운맛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는 순한맛 라면을 좋아하고 아내는 아니다. 며칠 전 밤에, 야식을 먹고 싶었고, 우리는 라면을 먹겠다고 찬장을 봤는데, 있는 것은 너구리 순한 맛뿐. 슴슴한 순한맛 라면을 아내도 즐겁게 먹으려면 어째야 하나 생각하다가 냉동실에 있는 청양고추를 떠올렸다. 작년에 텃밭에서 길러 딴 고추들. 오이고추만 하게 크게 길러 땄는데, 맛은 불맛 청양고추. 결국 풋고추 반찬으로는 엄두도 못 내고 모두 썰어서 얼려 보관하고 있다. 너구리 순한맛에 청양고추 반 개 정도. 괜찮은 조합이지 싶었다. 말 그대로 깔끔한 매운맛. 보통 너구리와는 다른 느낌의 새로운 라면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맛과 아내가 원하는 맛을 어느 정도 절충해 준 그런 맛. 숟가락으로 계속 국물을 홀짝홀짝 떠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