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등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 이야기를 들려달라.
등
이제 막 기기 시작한 아기가
제 엄마를 알아본다.
엄마가 저를 두고
잠깐 다른 일을 하러 가는 것을 본다.
등을 본 아이가 곧 운다.
아기에게 엄마의 등은 곧
엄마의 부재다.
등을 돌리며 사라지는 엄마.
아기에게 엄마의 등은
엄마의 일부가 아니라
사라진 엄마다.
엄마의 등으로부터 나오는 게
거의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등을 보인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
이미 아기가 알기 때문인가.
등은 바깥으로 나와있는 신체 부위들 중
가장 소극적인 곳이 아닐까.
내가 직접 볼 수도,
쉽게 전체를 만질 수도 없는 부위.
내 손이 다 닿지 못하는
그런 먼 부위.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부위.
심하게 아프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관심도 없는 그런 부위.
등을 통해 뭔가 만들어지거나
전달되거나
표현되는 것은 거의 없지 싶다.
그저 밖에서 안으로
- 이를테면 등짝 스매싱처럼 -
전달되는 뭔가를 받아들이는
통로 정도나 되는 그런 부위.
그래서,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등에서 그 주인의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눈여겨볼 만한 일인 것이다.
내 앞에서 누군가의 돌아가는 등이 보일 때,
등이 굳게 다문 입처럼 보일 때,
혹은 그 등이 점점 멀어지고 있을 때,
등이 이전과는 다르게 처져 보인다거나
작아 보일 때 등등.
평소와 달리 누군가의 등이 눈에 띌 때,
왠지 모르게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그 사진을 찍고 싶어 했던 경험이
다들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럴 때 등은 그 소극적 면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무언가를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창문이 된다.
말로, 표정으로, 손짓발짓까지 동원을 해도
해결이 안 되는 그런 때,
그러니까, 우리는 최종 지점까지 가서야
‘등’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등'은 누군가의 신체 일부로라기보다는
그와의 관계가 종결될 것만 같은
그런 예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등에다 대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말만큼
절절한 말이 또 있을까.
등으로 듣게 되는 말만큼
더 뾰족하게 나를 찌를 말이 또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등으로 밖에는 듣지 못하는 말이나
등으로 밖에는 전할 수 없는 말만큼
마음을 저미는 말이 또 있을 것인가.
혹시나 당신이 잊지 못할 누군가의 '등'을
마음에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그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듣고 싶다.
그때 그 등이
무엇을 전달하고 있었는지 내게도 들려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