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내지 못하는 시작.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그 자리만큼 하늘이 더 아래로 내려옵니다. 가을이 아무리 깊어져도 겨울은 더 아래에서 하늘을 끌어당기나 봅니다.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더 내려옵니다. 그만큼씩 더 추워집니다. 하늘은 차가운 것인가 봅니다. 그러고보면 새파란 하늘을 볼 때마다 마음이 시원해지곤 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등산을 하거나 열기구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가면 땅에 있을 때보다 공기가 시원해지다가 차가워집니다. 조금이라도 태양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일텐데도 시원해지는 걸 보면 하늘은 분명 차가운 것인가 봅니다.
여기까지 쓰고 그는 더 이상 문장을 이어가지 못했다. 키보드를 연달아 누를 때 나는 소리들이 그래서 어쩌라고, 혹은 그러니까 뭐 하고 누군가가 앞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화면의 흰 여백을 글자들이 한껏 내달리게 하고 싶은 마음이 어깨와 팔을 거쳐 손가락까지 이어진 것 같긴 한데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나는 소리가 그가 쓰는 글자들이 속력을 내지 못하게 했다. 그가 키보드를 누를 때 나는 소리 중에서 스페이스 바를 누를 때 나는 소리가 가장 컸는데, 사실 그는 이 사실을 방금 깨달았다. 키보드를 누를 때 나는 소리가 의식되고 나서 소리의 크기에까지 그가 신경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쓰던 글을 조금 더 이어서 쓰기로 했다.
하늘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면서 나뭇잎을 마르게 합니다. 나뭇잎은 말라가다 땅에 떨어집니다. 빙글빙글 돌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날리거나 그저 뚝 떨어집니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딱 그만큼씩 하늘이 내려옵니다. 하늘은 나뭇가지들도 말리지만, 나뭇가지들까지 떨어뜨리지는 못합니다. 하늘이 나뭇가지들을 감싸고, 나뭇가지들은 눈치채지 못할만큼 움츠려들지언정 꺾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예리해진듯, 하늘 사이로 스스로를 찔러 넣는 것 같습니다. 내려오는 하늘이 수많은 나뭇가지들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을에 하늘을 보면 나뭇가지들이 끼어듭니다.
잠깐 동안, 그는 키보드의 소리가 아닌 하늘색의 하늘과 나무색의 나무만을 손끝에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엔터키를 치는 순간 엔터키를 치는 소리를 시작으로 다시 키보드의 다닥거리는 소리가 손가락 끝에 붙기 시작하고 글 주변을 테두리 친 모니터 화면과 그 뒤에 가로 놓인 책상 파티션이 보였다. 자석과 거기 붙여놓은 업무 서류가 그에게 현실이 이곳이라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 드러내고 있었다. 점점 스페이스 바 누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그래서 잠깐 잠깐 멈출수록 스페이스 바 누르는 소리가 커졌다. 손가락이 몸에서 분리되어 키보드와만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는 생각을 하고나자, 다시 그의 글은 멈춰버렸다. 화면에서 커서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 깜빡거림에 그는 초조해졌다. 글이 멈출 때, 커서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커서가 깜빡거리지 않게 하기 위해 아무 자판이나 눌렀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멈춰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아무런 말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손가락으로 자판으로 계속해서 화면의 글을 전진시켰다.
눈으로는 기온을 볼 수 없지만 보이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바닥이 좁아지고 하늘이 넓어지면, 솔잎의 부드러운 낙엽들이 마치 땅바닥에 박혀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처럼 밟히면, 햇빛이 점점 누워가며 사선으로 눈을 찌르다가 어느새 다시 힘없이 스러지면, 밤 하늘에 별이 하루 또 하루 또렷해지면, 손목을 넘어가는 소매가 거추장스럽기 보단 오히려 아쉬워지면, 겨울은 어제보다 오늘 더 짙어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것들은 다 뒤늦게 따라 알게되는 것이겠습니다. 내 몸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닿는 것은 눈입니다. 그러나 바로 옆에 혹은 지금 온전히 나를 감싸고 있는 겨울은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손가락으로 내보낼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머릿속을 아니, 그의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보았다. 이미 내보낸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떠올린 건, 그러니까 떠올릴 수 있는 건 이미 어디엔가 적었던 것들뿐이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지난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내용들이 이미 한 번 이상 적었던 것들뿐이고, 나머지는 마치 그것이 착각인듯 분명히 보고 듣고 느꼈을 어떤 것들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는 그것을 이미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속이 상했다. 속이 상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한 번 더 시도 하였다. 혹시 아직 적지 않은, 어딘가에서 바깥으로 꺼내놓지 않은, 손가락으로까지 전달하지 않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뭔가가 남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타이핑 하지 않은 것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쓴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일까. 기억에 남아 있지만 아직 쓰지는 않은 어떤 것. 사람이 누구나 죽는 것처럼, 그것들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조급해졌다. 마치 없어지기 전에 꼭 남겨야 할 만큼 그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더 써내려갈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주무르며 목을 돌리다가 대각선 앞에 2인용 테이블에 앉아있는 한쌍의 남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앉아 있는 스타벅스 카페 내부는 커다란 ‘ㄴ’자 모양이었다. 카운터와 음료를 만드는 공간을 테이블과 좌석들이 놓인 공간에 둘러쌓여 있는 구조였다. 토요일 저녁이었고 빈 자리는 거의 없었다. 12월 초순에 기온이 갑자기 영하로 내려가는 강추위를 만난 날이라 따뜻한 실내를 찾아 카페로 들어오는 손님이 많았다. 그에게 그 커플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둘의 어긋난 시선 때문이었다. 분명 둘 사이에 뭔가 있었다.
‘ㄴ’의 세로획 맨 아랫부분에 해당하는 벽에 붙어 있는 2인용 테이블에 여자와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의 자리에서는 남자의 옆 모습과 뒷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캐롤을 재즈로 편곡한듯한 가벼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중고생 자녀들과 함께 나온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인도에 맞붙은 창가 자리에 주말 저녁의 무료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앞으로는 초등생 혹은 더 어린 형제들이 딸린 가족 3대가 앉아있었고 그의 옆자리에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 듯한 중년 남자 3명이 술에 약간 취한 채로 업무 얘기인듯 사는 얘기인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더 안쪽에 있는 소파 자리에는 카공족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노트북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팀별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런 사이에 서로 전혀 다른 곳을 일부러 보고 있는듯, 말 한마디 없이 앉아서 어긋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그에게 어떤 기대감을 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 3명이 자리를 뜨고, 카운터에서는 계속 새로운 음료가 완성되었다는 안내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오가고 저녁은 더 저녁이 되어갔다. 카페 안에서 그 남녀만이, 어긋난 그대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