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재 Nov 03. 2022

미국인들이 내 영어를 못 알아듣네

하루 10분,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매년 빠지지 않고 새해 목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지 10년이 훌쩍 넘은, 이제 일기장에 적는 것도 민망한 그 목표는 바로 영어 공부. 오랜 시간 마음 한편에 '영어'라는 과제를 지고 살아온 것이 아마 나 혼자 아닐 거다.


'초등'학교를 다닌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이 그렇듯 어릴 때부터 영어학원에 다녔다. 요즘의 영어 유치원 정돈 아니지만 나름 원어민 선생님이 상주하던 곳이었고 그곳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영어를 꽤 했던 것 같다. 그때를 회상해보면 지금 실력이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다. 성인이 되고  영어 공부라곤 영어로 된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다. 문화 사대주의 덕에 리스닝 실력은 늘었지만, 문제는 스피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디터였던 시절 뉴욕으로 두 번의 출장을 갔다. 미드 시청으로 다져진 리스닝 실력에 나름 자부심이 있었고 유학생활 덕에 외국인 울렁증도 없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센트럴 파크 앞에 위치한 4성급 호텔엔 변압 콘센트가 없었다.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이 묵는 곳이기에 변압 콘센트 한두 개 정돈 당연히 구비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드디어 내 영어실력을 써먹을 때가 온 것인가. 호기롭게 프런트 직원에게 콘센트를 파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몇 번이고 다시,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하게 내뱉어 봐도 결과는 같았다. 결국 스마트폰 검색을 통해 스스로 콘센트 구입처를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십수 년간의 영어 공부에 배신감을 느꼈고, 내 무능력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다. 흔한 핑계지만, 일하느라 바빴다.


몇 년 후엔 발리로 여행을 갔다. 택시기사는 내가 외국인인걸 보고 미터기를 켜지 않았고,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불렀다. 호텔에 부탁해 부른 콜택시는 다를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영어로 기사에게 미터기를 켜달라고 했다. 기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택시에 같이 탄 친구는 미국 유학생이었고, 그녀가 유창한 발음으로 항의하자 기사의 표정이 달라졌다. '너 영어 잘한다. 어디서 배웠어?'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제야 미터기를 켰다. 굴욕적이었다.


또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영어 스피킹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먹고 사느라 바빴다.




하루 10분,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나 프로젝트'의 시작은 영어공부였다. 이번엔 '먹고 사느라 바빴다'는 핑계를 댈 수 없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생각해낸 방법은 공부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에 딱 10분.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어도 하루 10분의 시간은 낼 수 있으니까. 더 이상 '일이 바빠서'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


앱스토어에 들어가 가장 평점이 좋은 영어 공부 앱을 다운로드다. 앱 이용은 무료여야 했다.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그만둘 수 없도록.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앱엔 10분의 학습 시간을 설정하는 기능이 있었다. 학습목표 10분을 정해놓고 그 목표를 달성하자 '불꽃'이 켜졌고, 하루라도 학습하지 않으면 그 불꽃이 꺼졌다. 별것 아닌 장치였지만 '참 잘했어요' 칭찬 스티커를 모으는 듯한 보람이 있었다.


단어가 문장의 일부가 될 땐 앞뒤 단어와의 연결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발음을 다르게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연음이 어려운 단어의 발음은 적당히 생략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는 것, 문장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의 억양을 강조해야 알아듣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어를 비롯세상 모든 언어가 공통적으로 지닌 이 간단한 원리를 이제야 깨달았다니.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많은 문제가 해결됐다.




누가 뭐래도


10개월이 지난 지금, 가끔 깜박하고 '불꽃'이 꺼진 적은 몇 번 있지만 이제 매일의 루틴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미국인들이 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발음뿐 아니라 억양의 문제가 컸다는 걸 알게 됐다. 가끔은 공부를 하다가 의도치 않게 목표 시간인 10분을 넘기기도 하고, 다른 플랫폼을 통해 나머지 공부를 하기도 한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한 문장을 자연스럽게 뱉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10개월이 지난 지금은 한 문장을 통째 외워 원어민이 발음하는 예문과 비슷하게 따라 하는데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


솔직히 아직 누군가에게 자랑할만한 실력은 아니다. 그러나 제법 그럴싸하게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됐고 녹음된 내 영어 발음을 감상하며 남몰래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가끔은 그 목소리에 도취돼 '이거 완전 원어민 같은데?'라는 생각마저 한다. 누군가는 코웃음을 치겠지만 난 내 발전된 모습이 너무 기특하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미국인들도 내 영어를 알아듣는 날이 오겠지. 그동안의 굴욕으로 생긴 영어 트라우마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평행 우주 어딘가에 더 멋진 내가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