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읽고 싶지만 짐을 늘리긴 싫어
도서관 카드를 만들었다
쾌적한 도서관이 있는 주민센터와 불과 100미터 남짓한 거리에 산다. 그러나 서류 발급을 위해 방문한 것을 제외하곤 5년 동안 단 한 번도 시설을 이용하지 않았다. 물론 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좋은 인프라여도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저 나와 상관없는 건물일 뿐이다.
그동안 내가 책과 거리를 두었던 것엔 조금 독특하고 어이없는 핑계가 있었는데, 바로 '짐을 늘리기 싫어서'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이사를 자주 다녔던 어린 시절을 비롯해 추가 운송비용이 엄청난 비행기에 모든 짐을 실어야 했던 유학시절, 현재의 캥거루족 생활까지. 내 소유의 집 없이 평생 떠돌았던 난 몇 년마다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짐이 무겁고 많을수록 이사가 어려워졌고, 짐을 최대한 가볍게 해 언제든 손쉽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었다. 물건이 늘어나면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고 내게 물건은 곧 번거로운 짐이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만약 그게 없다면 새로 구입해야 할 정도로 유용하거나, 버린 것을 훗날 '틀림없이' 후회할 가치 있는 물건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짐짝'이라 칭하고 가차 없이 처분했다. 내 소유인 짐의 총량을 늘리지 않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새로운 티셔츠 하나를 구입하면 오래된 티셔츠 하나를 버려야 하는' 나만의 규칙을 따르기도 했다.
소유하지 않아도 읽을 수 있다
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두 번 이상 읽었고, 평생에 걸쳐 몇 번이고 다시 꺼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책들만 남기고 나머진 모두 처분했다. 그렇게 완성된 책장은 두 칸 정도로 단출했다. 여분의 공간도 남기지 않았고, 단 한 권의 책도 더는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이렇게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내 '리미티드 에디션 책장'을 더는 늘리고 싶지 않았다. 책은 밀도가 높아 무거운 물건이니까. 언제 또 짐을 옮겨야 할지 모르는데 말야.
그러나 이 미니멀리스트에게 새로운 책을 '들이지 않는 것'은 곧 새로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고, 이토록 명백한 공유의 시대에 '소유하지 않아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저명한 사실을 잊어버렸다. 한동안 독서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냈다.
그 대신 영상 세대답게 유튜브와 OTT에 빠졌다. 알고리즘에 걸린 한 유튜버의 책 추천이 진심으로 느껴진 어느 날 비로소 '도서관'이라는, 수십 년간 존재해온 책 무료 공유 시스템이 머리 위에 켜진 전구처럼 '띵!'하고 떠올랐다. 그렇게 도서관 앞에서 생활한 지 5년 만에 마침내 그곳에 첫 발을 내디뎠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2주
지금까지 난 '도서관'이라고 하면 어린 시절 교내에 있던 체리색 가구와 회색 테라조 바닥으로 이뤄진, 지루하고 칙칙한 장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십수 년 만에 처음 가본 도서관은 그보다 훨씬 예쁘고 쾌적했다. 내가 상상하던 예전의 도서관이 아니었다. 도서 대출과 반납은 자동화기기로 이뤄졌고, 분위기도 웬만한 스터디 카페보다 좋았다. 보유하고 있는 도서의 스펙트럼도 넓었다. 최신 베스트셀러부터 각종 전문서적, 영화 아카이브 북까지 결정장애를 유발할 정도로 다양했다. 도서관 카드를 발급받고 마음이 가는 책 몇 권을 골랐다.
'2주'라는 명확하고 탁월한 수치로 제한된 대출 기한은 곧 내가 완수해야 할 미션이 됐고, 대출도서와 내가 함께하는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만들었다. 수량이 정해진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물건에 대한 욕망이 커지듯이, 짧은 수명이 정해진 관계는 더 강렬한 법이다.
대출기한 없이 언제든지 손만 뻗으면 꺼내볼 수 있는 책장 속 책이 바로 옆 '넷플릭스 - 유튜브 - 인스타그램 3 대장'으로 구성된 막강한 스크린 군단을 물리치고 내 주의를 끌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하지만 소유할 수 있는 기한이 정해진 책은 그것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고, 2주 내내 책상 한편에서 '자기야, 우리 시간 며칠 안 남은 거 알지?'라며 존재를 어필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서재 확장하기
이 혁신적 공유 시스템은 엄밀히 말하면 '무상대여'였지만 이는 곧 내 것처럼 대가 없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이므로 도서관의 넓은 책장을 소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책이 해당 도서관에 없다면 주문 신청을 넣거나 구내 다른 주민센터와 상호대차로 편리하게 받아 볼 수도 있었다. 내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책장이 구내 수많은 도서관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수만 권의 책이 내 소유나 다름없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서재를 확장한 것이다.
초반엔 수만 권의 책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나서 한번 방문할 때마다 최대 대출 개수인 다섯 권을 꽉 채워 빌렸다. 그러자 오히려 책 한 권 한 권에 집중할 수 없었고, 무거운 과제가 되어버렸다. 나름 짬이 찬 지금은 한 번에 한두 권씩만 빌려 찬찬히 읽는다.
책을 고를 때 도서관에 직접 방문할 필요도 없다. 본문 미리보기를 지원하는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고, 맘에 드는 책이 있으면 구립도서관 사이트에서 보유 여부를 검색한다. 가까운 도서관에 없다면 보유하고 있는 다른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을 하고, 구비한 도서관이 없다면 신규도서 신청을 하면 된다. 책이 준비되면 구청에서 카톡 알림을 보내준다.
바쁘게 살다 보면 책을 가까이하기 어렵다.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은 2030 세대라면 특히. 책과의 거리두기를 끝내고 싶은 분들에게 제안하는 최고의 방법은 도서관에 가보라는 것이다. 구립도서관은 밤 10시까지 열려있으니 퇴근 후에도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다. 일단 집 주변 도서관에 가서 카드를 발급받고 찬찬히 둘러보라.
당신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고, 당신과 함께 보낼 2주를 기다리고 있는 책이 분명 한 권쯤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