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는 제대로 연주한다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내는 피아노 소리는 우리가 아는 피아노 소리와 확연히 다르다. 손열음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에선 실제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조성진이 연주하는 '라 캄파넬라'에선 청명한 종소리가 난다. 어떤 화음에선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바다 위에 별빛처럼 반짝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 황홀한 멜로디를 그저 귀를 통해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직접 연주하며 감상하면 온몸의 세포가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리듬에 맞춰 파도처럼 일렁이는 오선지를 타고 미끄러지며 노는 듯한 느낌이다.
양손이 서로 다르게 움직이며 조화로운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은 단순한 기분전환 이상의 효과가 있다. 양손을 이용해 악기를 연주할 때 우리의 뇌는 전신 운동을 할 때처럼 많은 부분을 동시에 처리하게 된다.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단련되고 인지능력이 향상된다.
두 손으로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사라진 시대에 이만큼 좋은 두뇌 운동이 있을까. 악기를 습관적으로 연주하면 뇌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 5년 동안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특별히 피아노에 흥미가 생겨 배운 것은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집안의 어린이라면 모두 한 번쯤은 피아노 학원에 다녀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별 의욕 없이 배웠던 거라 남은 것은 전혀 없다. 이젠 악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은 악보 대신 유튜브에서 악보에 따라 건반이 눌리는 그래픽 영상을 보고 따라 하며 곡을 외운다. 악보 보는 법을 까먹어서 이렇게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게 된 게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리듬을 타고 놀기 위해선 어차피 아무것도 보지 않고 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눌러야 할 다음 건반을 찾아가는 데 바쁜 상초보자라 아직은 온전히 즐기는 연주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지만, 화음 하나하나의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음 하나를 치면서도 자아도취에 빠진다.
조성진도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연습을 하지 않는다는데, 피아니스트도 아닌 내가 지난주엔 내내 매일 밤 아홉 시부터 열두 시까지 꼬박 세 시간씩 피아노를 쳤다. 이렇게 불같이 관심을 쏟다가 어느 순간 질려버리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되기도 하고, 손목이 시큰거리기도 해서 앞으론 한 시간 이상 연습하지 않기로 했다.
요즘 내 연주 레퍼토리는 Just the two of us - Entertainer - 밤의 여왕 아리아 - The Crave - She's a Rainbow - 언제나 몇 번이라도 -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 The Girl from Ipanema - Rhapsody in Blue 다. 물론 이 모든 곡을완벽하게 치는 것도 아니고,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는 것도 아니다. 내 수준에 맞는 쉬운 연주법을 골라 익혔고, 각 음악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만 골라 연주한다. 연습할 곡도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음악으로만 고른다.
어릴 적 피아노 학원에 다닐 때 교본에 있는 곡들을 순서대로 배우는 대신 지금처럼 내가 좋아하는 곡을 골라 배웠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렇게 즐겁게 배웠다면 진로를 음악 쪽으로 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곡이라고 해도 새로운 곡을 처음 연습할 땐 끝없는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것처럼 힘들고 지루한 시기를 견뎌야 한다. 분명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사실 손의 배움이 느린 게 아니라 그냥 머리가 좋지 않은 거지만, '머리는 좋지만 손이 나쁘다'라고 생각하고 싶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봐도 내 손은 "근데 아까... 뭐라고 했지?"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아, 이거 말한 거였어?" 라며 술술 능숙하게 건반 위에서 춤을 춘다. 어제까지 오르막길처럼 더디고 답답했던 부분이 오늘은 갑자기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 술술 넘어간다. 마치 99도까지 액체였던 물이 1도 차이로 한순간 갑자기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타난다.
성장그래프가 완만한 곡선이 아니라 계단식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는 이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피아노 연주는 내가 새로운 곡을 시작할 때마다, 다음 마디를 연주할 때마다 그 마법을 보여준다.
그래서 난 어린이보다 성인일수록 악기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성장의 여지를 발견하기 힘들어진 성인에게 이렇게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제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