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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재 Feb 07. 2023

35세 미만 구독 불가

<인간 실격>에 구독 연령을 매긴다면


나는 17살 겨울 방학을 양평 산기슭에 위치한 기숙학원에서 보냈다. 숙소에서 같은 방을 쓰던 친구 영진이는 책을 안아름 들고 입소해서 시간 날 때마다 읽었는데, 어느 날 영진이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의 제목이 내 호기심을 자극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보싶다고 했다. "응, 이거 되게 괜찮아. 다 읽고 나면 빌려줄게." 영진이는 특유의 한결같이 무심한 눈빛 그에 어울리는 무심한 추천멘트를 날려 나의 기대를 높였다. 그날밤 자습 시간에 <11분>이라고 쓰인 그 책을 펼쳤다.


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어린 나이였어도 대부분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영진이네 부모님은 영진이한테 이런 책도 사주나...?"였다. 그동안 공부밖에 모르는 재미없는 모범생으로만 생각했던 영진이가 다시 보이기도 했다. 이런 노골적인 책을 퍽 진지한 얼굴로 '괜찮은 책'이라며 추천해 주다니. 게다가 이런 책에 '청소년 구독 불가'라는 빨간 띠지가 달려있지 않은 것도 이상해 보였다. 문학에도 구독 연령 제한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얼마 전엔 서점 내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프랑수아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었다. 샤갈의 그림이 프린트된 그 표지의 책이 어린 시절부터 책장에 꽂혀있어 익숙하기도 했고, 아마 언젠가 한 번 읽어본 적도 있을 것이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샤갈의 그림과 책의 제목이 워낙 클래식하고 봄처럼 부드럽게 느껴지는 책이기에 부담 없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어느 순간 페이지를 넘기면서 옆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노골적인 묘사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소리 내어 읽기엔 민망한 장면들이 꽤 보였기 때문이다.


"작품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비로소 외설이 된다."라고 했던 에곤 쉴레의 말처럼, 외설적인 것은 그 책이 아니라 내 마음일지도 모른다. 요즘말로 내 머릿속에 '음란 마귀'가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성적 묘사를 포함한 문학에 '청소년 구독 불가'를 붙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도 너무 1차원적이고 편협한 생각이었다. 일방적으로 이미지를 전달하는 영상과는 달리 글은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다.


선천적으로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은 글이 묘사하는 꽃향기를 맡을 수 없다. 외설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외설적인 글을 봐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모든 것을 외설적으로 보는 사람은 순수하고 아름다움을 묘사한 글에서도 외설적인 이미지를 찾아낸다.



그렇게 구독 연령 제한에 대한 생각을 거의 접었을 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게 되었다. 일본 문학은 대부분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 책은 언젠간 한 번쯤 제대로 읽어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 든 생각은,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은 꼭 구독 연령 제한이 있어야 '였다.


이 책이 어린 친구들에게 위험하다고 느끼게 한 것은 성적 묘사 따위가 아니었다. 책 전체에 퍼져있는 그 어둡고 무거운 기분, 내 피부로 전염될 것 같은 지독한 우울 때문이었다. 그 우울의 실체는 명확하지 않았다. 다자이 오사무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와 그 책의 내용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 같았다.


딱히 어떤 구절이 그렇다고 명확히 집어 수도 없었다. 오히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독특하고 개성 있는 문체, 그 책 고전문학의 전당에 오르게 한 빛나는 작품성만이 보였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구절까지 읽고 나면 마치 책 주위에 검은색에 가까운 보랏빛 연기가 느리게 피어오르 것 같았다. 그 후로 며칠 동안 그렇게 실체 없는 검은 연기가 내 피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지 않다고, 이 책은 자주 읽어선 안 되는 책이라고, 아직 어린 친구들이 이 책을 읽으면 이 검은 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출했던 <인간 실격>을 도서관에 반납했고, 이 책을 내 책장에 꽂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다짐했다.


그러나 며칠 뒤 놀랍게도 나는 소장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 책의 주문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맘에 들었던 몇 구절을 태블릿에 옮겨 적어놓았던 게 화근이었다. 너무 독특해서 자꾸 눈길을 사로잡는 문장들이 나를 끊임없이 유혹했다. 그렇게 <인간 실격>은 내게 최면을 걸어 내 책장의 한 구석을 꿰차는 데 성공했다.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에는 반드시 구독 연령 제한이 있어야 다. '15세 구독 불가'나 '청소년 구독 불가'가 아니라, '35세 구독 불가'가 되어야 한다. '35' 내 지인이 20대 초반에 이 책을 읽은 후 30대 초반까지 이상한 기운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해 참고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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