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여자만 타라는 법이 있나?

다소 감정적일 수 있음 주의

by 너굴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신입사원들이 흔히 멘붕에 빠지는 '내가 복사하고 커피 타려고 입사했나?'라는 고민의 연장선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고찰이라고나 할까.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 동안 화분에 물 주고, 신문 챙기고, 복사하고, 심부름도 했다. 아, 부장님 우루사도 아침마다 챙겨드렸다. 손님 차를 내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막내 생활을 마냥 즐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착한 사람이어서 업무분장에도 없는 일이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나의 수고를 알아주는 상사들, 유쾌한 업무 분위기, 부장님의 내리사랑(?)이 일을 찾아서 하도록 만들었다.


상사가 원하는 것을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일을 하기 전에 고민했고, 하고 나서 돌아봤다. 개선점을 찾고, 바꾸어 나갔다. 덕분에 나는 칭찬받는 직원이 됐지만, 그들이 없는 환경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인생에 빌런들이 등장했다.


어디선가 탁탁- 하는 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종이컵을 책상에 치며 나를 부르는 소리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컵을 좌우로 흔든다. 커피를 타 달라고 한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메뉴를 정하고 주문을 위해 종업원을 부른다. 손을 높이 들고 엄지와 중지에 힘을 실어 딱! 딱! 사무실에서 나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프린터 앞에서 서서 나를 부른다. "종이가 없네!" 인쇄 에러가 나자 새로운 닉네임을 나에게 선사한다. "프린터 전문가!"


화장실 가는 길에 내 자리를 지나며 말한다. "포스트잇 좀 내 책상에 올려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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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상한 대물림 현상을 발견한다. 부장이 직원들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면 차장이, 과장이 심지어 대리가 자신보다 직급이 낮거나 어린 직원들에게 부장이 되려 한다. 손님에게 차를 내어드리는 경우, 손님들만 앉혀두기 어려워 부탁을 했다고 치자. 손님이 떠난 후는 어떠한가. 그마저도 부하직원을 부르거나, 누군가 치울 때까지 놓아두는 경우가 허다했다.(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이다)


나는 지금 일하는 곳에서 유일한 여직원이자 가장 어린 직원이다. 그럼 당연히 손님 커피는 내가 타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상황이 바뀌면 나 역시 그럴 것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나는 어린 직원들과 일을 할 때 한 번도, 그들에게 차 접대를 요청한 적이 없다. 비서를 둔 임원이 아닌 이상 내 손님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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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직장에서 일을 할 때, 같은 회사 법무팀 변호사들과 점심을 함께한 날이었다. 그날 대화 주제는 옆에서 바라본 우리 부서였는데, 화두는 왜 남직원들이 자꾸 여직원들에게 차를 부탁하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스갯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변호사 1 "우리랑 연습합시다. 따라 해 봐요. 싫/어/요!"

변호사 2 "근데... 성격상 말을 못 하는 것 같은데..."

변호사 1 "아, 그래요? 어려워요?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변호사 2 "아니, 그걸 변호사님이 왜 이야기해요. 타 부서 일인데ㅋㅋㅋ"


그때만 해도 그게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터라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많다니' 하며 감동만 한 가득 받고 행복했더랬다. 십 년 전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도 아니고 불과 몇 년 전 일인데 왜 이렇게 격세지감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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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든 것이 태도 그리고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복사가 안 될 때 터치패드라도 이것 저것 눌러보고 있었으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했을 텐데... 평소 존중하는 말과 행동으로 좋은 유대관계가 쌓여 있었더라면 아침에 커피를 타며 '오늘은 뭐 드시겠어요?'하고 물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너굴이가 타 준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제는 "주말에 너굴씨가 타주는 커피 못 마셔서 어떡하지?" 하는 말에는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세상이 변했고, 나도 변했는데,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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