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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werzdx Oct 27. 2020

올해엔 만루홈런입니다

이사일기(2010-2020) - 3. 용강동 (2011.04)

최악을 경험하다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무렵에 출몰하기 시작한 모기는 그들의 자국들을 방벽에 선명하게 남기고 사라져갔고, 끈기 없이 회사를 그만둔 후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두 달이 훌쩍 흘러갔고, 군대에서는 한 번도 입지 않던 깔깔이를 전주 집에서 찾아 꼭 안고 서울로 와서 입으며 흐뭇해하며, 그렇게 서른 살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2012년 1월 31일 - 지난 일주일간 나의 피지컬과 멘탈을 모조리 붕괴시킨 우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하여 싱크대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놓고 자야겠다.


   그렇다. 이 글이 적히기 일주일 전, 나는 서울생활 최악의 경험을 하고 말았다. 2012년 1월 24일은 구정연휴의 마지막 날이었고, 나는 20일 저녁에 전주 집으로 내려갔다. 추위에 취약한 집의 특성상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보일러를 약하게 켜놓았다(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놓았어야 했는데!)


   이 정도 설명만으로도 이 비극을 짐작하셨을 분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24일 연휴 마지막 날 집에 올라왔는데 보일러는 꺼져있었고, 수도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 분명히 보일러를 켜두고 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켜둔 보일러는 물 부족 상태가 되어 작동하지 않았고, 물도 나오지 않고 따뜻한 상태도 아니었던 수도관은 얼어붙고 말았다. 하필 그 때 물부족 상태가 될 줄이야.. 하지만 나의 실수다. 싱크대에 물 한 방울씩만 떨어뜨려놓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


   구정 연휴 며칠 전 분당의 그럴듯한 직장에 취업한 동거인은 이제 더 이상 이 집에 오지 않을 것이었고,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간단한 수리로 해결될 것을 바라며 며칠간 사람을 불러보았다. 물이 안 나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화장실 물도 못 내리는 암울한 날들이 며칠간 지속되었고, 오는 이들마다 동파되어 교체해야만 하는 상황이란다.


   결국 큰 공사에 돌입, 나는 친구집에서 신세를 졌고, 집주인은 나의 불찰이라며 모든 공사비를 내게 부담하게 했다. 보일러의 고장과 오래된 집의 열악한 상황을 어필하였으나 맹추위에 집을 며칠간 비우면서 왜 수도를 잠궈놓았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임대차 계약과 집에 관련된 지식이 있었다면 합리적인 대처를 해볼 수도 있었겠으나 잘 알지 못해 자책하며 곧이곧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대해 신물이 나고 모든 정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저니맨


   “더 이상 이런 열악한 집에서는 못 살 것 같습니다. 공사비는 제가 부담할 테니까 계약해지 해주세요. 창문틀 아귀도 안 맞고 이렇게 덥고, 춥고, 화장실도 이렇게 좁고. 혹시 자식이나 손자가 이런 집에서 이 월세 내고 산다고 하면 이게 정상일 것 같나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다음 세입자를 구해놓고 나가거나, 석 달분 월세를 선납하면 계약을 해지해 주겠단다. 허 참, 이런 집을 갖고도 그렇게 해야할까? 선생님을 하다가 정년퇴임했다는 것이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다, 정말 건물주가 대수로구나.


   다음 세입자를 구하겠다고 했더니 월세를 10만원 올려서 집을 내놓으란다. 이유를 물으니 우리가 나가면 집을 수리하겠단다. 아니 지금 이 상태로 집을 보여주는데 지금보다 월세를 10만원 올려서 누가 들어오겠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니 알아서 하란다.


   임대차 계약 관련 지식이 별로 없었고, 어떻든 내가 임차인이고 계약기간은 끝나지 않았으니 해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10만원 올린 월세로 집을 내놓고, 몇 사람이 보고 갔지만 계약을 하겠다는 이가 나타날 리가 없었다.


   고심 끝에 나도 집을 알아보고, 이사를 결정했다. 집 같지 않은 집이었지만, 마포구는 서울의 외곽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집값이 비쌌다. 동거인은 다른 곳으로 갈 예정이어서, 나는 연신내역 쪽에 말끔해 보이는 원룸을 구했다. 지금까지는 가장 집다운 집.


   수도관 공사비도 내가 부담하고, 석 달분 월세도 다 내주고, 이사를 하기로 했다. 도보 5분이면 한강으로 나가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용강동 집에서, 최악의 마지막을 경험하게 될 줄이야.



올해엔 만루홈런입니다

2012년 2월 7일 - 서른 한 살 친구 세 명, 한 방 침대에 누워있다. 21세기 최고의 축구감독 순위, 넥타이 매는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 중.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20대만 불안한 것이 아니야. 우리 셋의 다큐 영화를 찍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제목은 베스킨라빈스 써리 원.



   이사 3일 전, 오래된 친구 집에서 한잔씩 하고 방에 누워 우리의 지금을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나는 *저니맨 신세가 되었고, 동거인 밴드 멤버는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떠났고, 또 다른 밴드 멤버는 학업을 마치러 돌아간 전주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되찾았다.


   나는 방과후학교 기타선생을 하며 매주 초등학생들과 사투하고 있었고, 다른 일거리 하나를 더해 겨우 나의 시간을 연장하고 있었지만, 용감하게 서울생활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올해엔 만루홈런입니다’ 어떤 자신감이었을까?




*저니맨 : 해마다 또는 자주 팀을 옮기는 운동선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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