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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Mar 22. 2020

거꾸러진 유학생의 일상

지난 2주는 충격과 걱정, 두려움, 답답함 속에 살았다. 2주 간의 봄방학을 맞아 맘 편하게 쉬면서 날씨가 좋으면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싶었는데 단숨에 꿈같은 얘기가 됐다. 하루 종일 집에 들어 앉아서 책을 읽고, 숙제를 하고, 아기를 보고, 밥을 해먹고, TV를 본다. 이 정도 집에 붙어있으면 월 $1700의 렌트비 뽕은 뽑는 걸까. 아니다. 사실 이번 팬데믹 전에도 우리 부부는 집돌이 집순이라 집에 머무르는 시간에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다만, 내 의지로 나가지 않는 것과 억지로 나가지 못하는 건 확연히 다르다. 그래, 그래서 군대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니까. 군대 같은 경험을 다시 하게 될 줄이야.


당장 내일모레 월요일이 개강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는 한 미국 내 모든 대학교는 현장 수업을 취소하고 온라인 수업으로 돌아섰다. 내가 다니고 있는 버지니아대학교도 물론 예외가 아니어서, 월요일이 와도 난 집 밖을 나가지 않고 내 방으로 걸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는 노트북 화면과 그 위에 붙어있는 조그만 카메라 렌즈를 통해 교수님과 친구들을 만나게 될 예정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수업이 케이스를 기반으로 한 토론 수업이기 때문에 과연 온라인 수업의 실제 퀄리티가 어떨지 궁금하다. 실제 교실에서 경험하던 숨 가쁜 토론의 열기와 교수님들의 열정은 온라인에서도 어느 정도 재현될 수 있을까. 나는 학점의 50%를 차지하는 '참여 점수'를 획득하기 위해 노트북 마이크에다 대고 충분히 잘 소통할 수 있을까.


걱정은 여기서만 그치지 않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미국 MBA에서 지금 시기는 대부분 학생들이 여름방학 동안 일할 인턴쉽 자리가 정해진 상태에서 남은 학기를 즐기는 분위기인 게 맞다. 하지만 지금은 180도 거꾸러졌다. 우선 이미 인턴으로 일하기로 약속한 회사에서도 일부 취소 사례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계약서에 사인은 이미 했지만, 미국은 고용 유연성이 아주 높기 때문에, 일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잘라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나를 포함해 여러 친구들이 걱정하고 있다. 여름방학 때 인턴을 하면서 돈도 벌고 경력도 쌓아야 하는데 큰일인 것이다. 여기다 이번 팬데믹이 가져올 경기침체로 인한 여파도 두통을 유발한다. 우리 동기들이 졸업하게 될 내년 여름에 경기가 좋을 리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좋은 직장에 유리한 조건으로 자리 잡기 더 어려울 거다. 이걸 위해 1-2억 원을 들여 MBA를 하는 건데 정말 큰일이다. 이제 막 아빠가 됐는데, 졸업 후 백수가 될 순 없다.


아직 75일 정도밖에 안 산 딸아이 걱정에 웬만하면 안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래도 하루 한 번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한다. 다행히 시골에 살고 있어서 길에 사람이 잘 없다. 뉴욕 같은 도시에 살았다면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6피트 거리를 유지하지 어려웠을 텐데, 여기선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다. 대도시와 달리 코스트코와 트레이더죠에도 물건이 많이 남아있다. 감사한 일이다. 원래 도시보다 시골을 좋아해 왔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서 더욱더 인구가 밀집된 도심에 살고 싶은 마음은 다시 생기지 않을 것 같다. 한국에 살 때도 난 서울보다 부모님이 사는 강원도 춘천이나, 아름다운 제주에 살고 싶었다. 직장이 없다는 게 유일하지만 치명적인 문제다. 그런데 이번 시대적 이벤트가 이걸 바꿔놓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요즘 든다. 내가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들은 굳이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많은 고용주들이 재택근무의 효용을 깨달아가고 있다. 미국 직장에 속해 있으면서도 재택근무를 통해 1년에 몇 달은 춘천이나 제주도에 살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가고 있지 않나 싶다.


재택근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문화도 주류가 돼 갈 것 같다. 미국도 요즘은 여러 가지 앱과 서비스를 사용해 많은 음식들을 배달시켜 먹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일단 배달비가 비싸다. 우리 지역의 경우 보통 배달비 $3에 배달원 팁 $4가 추가로 붙는다. 2인 음식값만 $20라고 했을 때, 세금에다 저 배달 관련 비용 $7을 더하면 단숨에 $30가 돼버린다. 햄버거 하나 시켜먹는데 요즘 환율로 치자면 3만 8천 원 정도 되는 것이다. 오늘 DoorDash라는 음식 배달 플랫폼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배달비를 면제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정부의 권고 또는 명령으로 홀에 앉아 식사하는 게 금지된 지금, 많은 식당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기존에는 배달을 안 하는 레스토랑들도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고, 웬만한 배달 매출로는 기존 영업 수준을 달성할 수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배달비를 면제해 주는 것이다. 더 많은 식당들이 배달에 동참하고, 배달비가 내려가고, 한동안 시켜먹는 습관이 들다 보면, 이번 전염병이 지나가고 나서도 음식을 시켜 먹는 빈도는 확실이 지금보다 높아져 있을 것 같다(음식 가격만 좀 더 싸진다면).




이런 사소한 것들 말고도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 일상에, 마음가짐에, 습관에, 관계에, 가치관에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흔적들을 남기고 떠나갈까. 이 시련이 지나간 뒤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전과 얼마나 다른 모습일까.



커버 이미지: Photo by Jean-Philippe Delbergh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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