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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Jun 02. 2020

실리콘밸리 출근 첫날

feat. 방구석 출근

뜨거운 햇살에 눈을 떴다. 이곳 버지니아는 5월부터 이미 한여름 같아서 해가 너무 길다. 아침 6시 전에 해가 뜨고 저녁 8시 넘어 해가 진다. 우리 집은 동향이라서 아침에 특히 해가 강하게 든다. 자연적으로 늦잠 자기 힘든 구조다. 이 때문인지 아님 원래 그런 건지, 딸아이도 매일 6시면 눈을 뜨고 끼잉 끼잉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오늘도 그랬다.


30년 살면서 처음으로 미국에서 출근하는 날이라 떨렸다. 비록 방구석으로 하는 출근(재택근무)이긴 해도 말이다. 기대도 컸지만 내심 두려움도 올라왔다. 내 능력을 잘 발휘해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특히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원격으로 일하는 이 구조에서 난 문제없이 잘 소통할 수 있을까? 인턴쉽 12주가 끝난 뒤에 난 리턴 오퍼(MBA 졸업 후에 풀타임으로 채용하겠다는 제안)를 받게 될까? 받으면 덥석 사인할 만큼 이 회사는 내게 맞는 좋은 회사일까?


돌이켜보면 뭐든 첫날은 언제나 떨렸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설렘보단 항상 두려움이 더 컸다. 2015년 7월 여의도로 처음 출근했던 날도 그랬다. 무슨 일을 시작해야 할지, 암묵적인 소통 코드는 뭔지, 내편은 누구고 적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눈치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은 항상 피곤하고 성가셨다. 물론 2013년 1월 공군 자대 배치 날처럼 떨리고 긴장됐던 날은 살면서 없었을 거다. 자대 배치 첫날, 부대에 들어서자마자 나와 동갑인 중대장에게 쌍욕을 먹은 그 순간은 평생 못 잊는다. 아무튼 결국 며칠만 지나면 몸도 마음도 새 환경에 적응할 거란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안다고 해서 첫날의 긴장감이 떨쳐지진 않더라. 기대감과 두려움 그 사이, 중간보다는 두려움에 더 가까운 그 어디쯤에서 난 매번 첫날을 맞이한다.


던킨도넛에서 사 온 베이글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고 샤워를 한 뒤, 딸아이와 작별 인사를 하고 출근했다. 출근 시간은 3초. 내 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켜면 끝이다. 퇴근도 순서만 반대일 뿐 마찬가지. 나중에 팬데믹이 지나가고 회사에 직접 출근하게 된다면 출퇴근에 낭비하는 1-2시간이 얼마나 더 아깝게 느껴질까? 팬데믹은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재택근무라는 옵션은 좀 반갑다. 내 업무(재무)는 원격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라, 학교 졸업 후에 다시 풀타임으로 일을 시작하더라도 주 2-3회 정도는 재택근무가 가능할 것 같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부터 매주 금요일은 회사가 텅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집에서 업무를 봤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시작은 역시 오리엔테이션부터다. 동부시간으로 오전 10시 반에 출근했다. 회사가 서부에 있기 때문에 회사 기준 시간으로는 아침 7시 반이다.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원격 근무하는 직원들도 있기 때문에 대략 중간 시간쯤으로 오리엔테이션 일정을 잡았나 보다. 여기서부터 기업 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발표 담당인 HR 팀장은 캐주얼한 티셔츠에 머리를 올려 묶은 노메이크업 상태였다. 겉치레에 관심이 1도 없는 것이다. 금융업계에서 정장만 입고 또 봤었기 때문에 내겐 생소한 광경이었다. 여의도를 떠나면서 다시는 정장을 입고 다니는 업에 종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일단 이건 지켰다.


회사 소개와 인턴 프로그램 소개가 이어졌다. 특별할 건 없었지만 한국 기업의 오리엔테이션과 확실히 달랐던 건, 오너나 경영진에 대한 신화(?)나 유구한 역사에 관한 주입식 교육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 자리를 기업 미션과 주요 제품에 대한 설명이 대신했다.


오토데스크의 미션은 '고객들로 하여금 (환경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위대한 물건을 디자인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슬로건은 굵고 짧게 Make Anything이다. 고객들은 오토데스크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자동차를 만들고, 건물을 짓고, 다리를 올리고, 스마트폰을 디자인하고, 3D 애니메이션을 만듦으로써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든다. 아래 영상 하나가 모든 설명을 끝낸다:



이곳엔 점심시간도,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면 된다. 회의 시간만 고려해서 스스로 업무 스케줄을 짜면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내가 있는 동부시간 기준으로 10:30에 출근해서 일정을 소화하다가 오후에 1시간 넘게 밥을 먹고 쉬다가 다시 미팅에 들어가서 최종적으로 7시 반에 퇴근했다. 서부 시간 기준으로 회의 일정을 잡았던 팀장은 내게 미안하다며 다음 회의부터는 동부 시간을 고려해 일찍 잡겠노라고 했다. 우리 팀에서 동부 거주자는 나뿐인데, 그것도 인턴인데, 나 하나를 고려해 미팅 시간을 옮기겠다니.


한국식 직장 문화를 잊어버리는 데 아직은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Photo by David Larivièr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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