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MBA 인턴쉽 첫 주가 지나갔다. 내가 회사로 마지막 출근을 했던 게 2018년 7월 13일. 2년 만에 월급을 받고 일이란 걸 다시 하게 된 거다. 첫 주라 긴장도 되고 신경도 예민해서 생각보다 피로가 많이 쌓였다. 그나마 운 좋게 출근 첫 주부터 회사 공휴일이 껴있어 금요일은 쉬었다. 회사 창립일 같은 그런 의미 있는 정기 공휴일은 아니고 그냥 CEO가 직원들 고생한다고 임의로 발표한 임시 공휴일이었다. 내 매니저에게 무슨 날이길래 갑자기 공휴일이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거 없어. 그냥 쉬면 돼" 이런다. 2주 뒤 금요일도 이런 공휴일이다. 대박.
첫 주라 내가 아는 게 없으니 업무랄 건 없었고, 대부분 시간을 미팅으로 보냈다. 팀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 회사도 이렇게나 미팅이 많구나 느낄 만큼 캘린더에 미팅 일정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아는 게 없으니 미팅에 들어앉아 있어도 멍 때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로 이해할 수 있었고, 매니저와 팀장에게 물어볼 질문 리스트도 만들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그 누구도 거저 떠먹여 주지 않는 것 같다. 내 주변 사람들 모두 친절하긴 하지만, 질문하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나서서 뭘 가르쳐주는 분위기는 아니다. 내가 질문하고, 내가 프로젝트 틀을 잡고, 내가 관계인들에게 연락해 친분을 맺고, 내가 스스로 내 성과를 드러내야 한다.
이런 미국식 근무 문화가 우려스러웠다. 한국에서만 일해 본 나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모르는 걸 질문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내가 검색을 하던 책을 찾아보던 혼자 배워나가는 게 내 방식이었다. 자기 노력 없이 너무 질문으로 쉽게 해결하려고 하는 건 무책임한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던 나였다. 그렇게 교육받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생각보다 공격적으로 여러 질문을 던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지난 MBA 과정 1년이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 학부에서 경영 전공을 했던 내게 MBA는 학문적인 가르침보다 실용적인 가르침과 경험을 준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질문할 용기가 자랐고 미국 사람들과 토론 방식으로 소통하는 게 꽤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게 MBA의 가치구나 싶고 내심 놀랐다. 지난 1년간 뭘 배웠나 도통 모르겠어 회의감을 느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주 내가 인턴쉽을 시작하면서 느낀 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좋은 회사, 시시한 업무?'이다. 회사는 여러 면에서 객관적으로 '좋다'. 돈을 많이 버는 알짜배기 비즈니스를 하고 있고 성장성도 크다. 팬데믹으로 경기침체 우려가 큰 상황에서도 실적은 좋게 나오고 있고, 전반적인 경기 사이클에 크게 타격받지 않는 안정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다. 복지는 얼마나 좋은지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실리콘밸리 테크 회사답게 분위기가 자유롭고 업무 형태가 유연하다. 언제 일하던 어디서 일하던 주어진 기능만 수행할 수 있으면 상관없다. 사람들이 친절하고 서로 협력을 잘하는 걸로도 유명하다.
반면 내가 하게 될 업무는 좀 시시하다. 재무 모델을 만들어 회사의 분기별, 연도별 매출 및 주요 성과지표를 전망하는 일이다. 이 전망이 정확할수록 주요 의사결정권자들(CFO 등)이 더 적절한 의사결정을 통해 더 나은 기간 성과를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반복적인 일이고, 보기에 따라 시시한 일이다. 같은 회사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낸, 입이 떡 하고 벌어지는 소프트웨어 제품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거인, 나처럼 금융/재무 전문가들은 개미처럼 보인다. 사실 이건 어느 회사에서 일하던 바뀌지 않는 지원업무의 본질적인 한계다. 내가 직접 제품을 만드는 엔지니어나 프로덕트 매니저가 아니라면 항상 개미 같은 서포팅 업무만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인턴쉽 1주 차 주제에 감히 예상하건대, 난 같은 업무로는 6년 이상 회사를 다니지 못할 것이다(6년은 미국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예상 시간이다).
'좋은 회사'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는 다르다. 우리말 표현은 꽤 자주 좋은 것과 좋아하는 것을 동일시한다. 어쩌면 우리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화와 교육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하다. "회사 좋아"라고 말하면 회사가 좋다(good)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 회사를 좋아한다(like)는 것일까? 굳이 구별을 해야 할까? 난 그렇다고 생각한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직업, 좋은 배우자를 강요한다. 'Like'가 아닌 'Good' 말이다. 주관적인 선호가 아니라 남들이 좋다고 평가하는 객관적 점수나 평판에 집착하는 것 같다. 우리가 보통 좋은 (good)것을 좋아(like)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다(good)고 좋아지는(like) 것은 아니지 않나. 좋은 배우자와 살아야 행복할까 좋아하는 배우자와 살아야 행복할까.
몇 달 전에 미국에 살고 싶은 이유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다음 메인에 올라 내가 결코 원치 않았던 수많은 뷰가 유입됐다. 수십만의 조회수가 올라가고 많은 댓글(주로 악플)이 달렸다. 별생각 없이 쓴 다이어리 같은 글이었는데, 왜 그렇게나 반응이 컸을까? 나는 미국을 이런저런 이유로 좋아한다고 썼다. 그래서 기간을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계속 미국에 살고 싶다고 썼다. 내 선호를 밝혔을 뿐이다. 그 누구도 설득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네가 미국에 얼마나 살아봤냐느니, 이런저런 단점은 알지도 못하면서 어리석은 생각이라느니 많은 비난이 있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자기는 미국이 좋다고 생각 안 하는 데, 네가 뭔데 미국이 좋다고 말하냐는 것이다. 미국이 더 좋으면 한국에 돌아오지 말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난 미국이 좋다(good, 또는 better than Korea)가 아니라 미국을 좋아한다(like)고 말한 것뿐인데. 이건 뭐지. 원래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선호는 비난하는 게 아니다.
내가 치킨을 좋아한다고 해서 피자가 안 좋다는 게 아니다. 치킨을 피자보다 더 좋아한다고 해서 치킨이 객관적으로 피자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다가 치킨은 튀겨서 몸에 안 좋다는 둥 금방 질린다는 둥 그래서 피자가 더 좋은 거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선호에 집중하면 된다. 좋다와 좋아하다를 구별하자.
'좋은 회사'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다닐 수 있는 회사만 의미 있다. 좋은걸 쫒다가 좋아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아니면 길을 잃게 된다. 애초에 좋아하는 걸 쫒으면 끝에서 실망할 수는 있지만 가는 길은 즐겁다. 다시 다른 걸 좋아하면 된다.
여하튼 좋은 회사에서 일하게 된 건 확실한데, 내가 여기서 하게 될 일을 좋아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난 좋아하지 않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인내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다. 인내력 말고 재미로 다닐 수 있는 회사로 판명 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