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역시 직장은 어디까지나 직장
내가 일하고 있는 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 기업인 Autodesk는 전반적으로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수평적인지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신입사원이나 인턴이라고 차부장 앞에서 주눅 들거나 조심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직급이 높다고 해도 웬만해선 내 일에 남이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다. 조언은 해 줄 수 있지만, 자기 일에 대한 책임은 자기에게 있으므로 직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이 내 결정을 대신하지 않는다.
질문과 감사 표현에도 적극적이다. 비록 자기가 보스라고 해도 팀원들의 의견을 묻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절차는 당연한 것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는 말은 그냥 매일 듣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더 직급이 낮은 직원에게 모르는 걸 물어보는 게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고마워, 수고 많았어” 같은 말도 참 많이 한다. 매주 정기 보고하는 업무는 그냥 넘어갈 만도 한데, 보고가 끝나면 꼭 “잘 정리하고 보고해줘서 고마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 같은 말을 빼먹지 않는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만난 우리 사업부 시니어 매니저들 모두가 비슷하다.
오늘은 CEO도 만났다. 인턴들을 대상으로 하는 TED 형식의 강연이었다. 강연은 짧았고 뒤에 질의응답과 대화가 길었는데, CEO 앤드루의 친근한 성격이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묻어났다. 한국에서 보던 무게 잡는 아저씨의 모습과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비교를 해보자. Autodesk의 시가총액은 한국 돈으로 60조 원이다. 코스피에서 삼성전자에 이어 두 번째로 시가총액이 큰 SK하이닉스와 같은 크기의 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대기업의 최고 책임자가 인턴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인턴: “당신이 CEO가 아닌 그 무엇인가가 될 수 있다면 뭐가 되고 싶은가요?”
CEO: “무조건 작가가 될 겁니다”
인턴: “작가라면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신 거죠? 항공/우주 분야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으니 SF물인가요?”
CEO: “어... 그건 비밀입니다. 제 창작 아이디어는 영업비밀인데 그냥 공개할 순 없죠. 하하하.”
인턴: “저도 당신처럼 CEO가 되고 싶은데, 좋은 CEO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CEO: “좋은 CEO는 상황이 만든다고 생각해요. 회사가 처한 상황에 꼭 필요한 사람이 CEO라야 하는 거죠. 저를 예로 들면, 만약 Autodesk가 고속성장 가도에 있는 회사였다면 저는 매우 매우 나쁜 CEO였을 겁니다. 회사의 급성장을 이끄는 것. 그건 제가 잘하는 게 아니거든요. 반대로 성숙한 회사의 안정석 성장을 이끌고 내실을 다지는 것. 이건 제가 아주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게 정답이겠네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한테도 강조하고 싶네요.”
한국에서 직장 다닐 때를 돌이켜 보면 부장/이사급 아저씨들과도 절대 나누지 않았을 것 같은 대화 주제와 분위기였다. 참 생경했다. 나이나 직급에 구애받지 않고 같은 레벨에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누구든 그를 존칭이나 직급이 아닌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점도.
물론 이곳이라고 마냥 수평적이라거나 자유롭다고 할 순 없다. 그래도 예의라는 게 있고, CEO에게 보고를 하는 자리에 그냥 반팔티에 반바지 달랑 입고 들어가도 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이건 회사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의라는 건 상식적인 수준에서 지켜야 한다. 우리 CEO와 CFO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영자들 보다는 유난히 더 친근한 성격을 가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니어 입장에서 자기에게 고과를 주거나 또 자를 수 있는 사람과 아무런 격이 없이 지낸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가끔은 뭔가 수직적 구조의 냄새가 나는 상황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전무에게 직접 내 프로젝트 성과를 발표할 일이 있었다. 나는 CFO도 격 없는 사람이니까 그냥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실만 가지고 발표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내 매니저가 묘하게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 대신 눈치를 보고 있는 거였다. 내가 발표를 잘해야 나에 대한 평가도 좋게 나올 것이고, 자기도 쓴소리 듣지 않을 거라 염려가 많아 보였다. 이 때문에 난 하루 온종일 PPT 슬라이드 디자인을 이쁘게 고쳐야 했다. 내 매니저의 매니저도 비슷했는데, 말단 직원을 잘 지도해서 좋은 성과를 내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전무에게 잘 포장해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아 여기도 눈치를 보는 정치(?) 비슷한 건 있구나' 느꼈다. 격이 없고 수평적으로 보이는 조직 안에도 결국 ‘힘 있는 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눈치 보기와 구색 갖추기’는 똑같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모나고 삐뚤어서 ‘정치’는 잘 못하는데 큰 일이다. 미국, 그것도 실리콘벨리에서 앞으로 계속 일하더라도 계단 높이는 못 올라갈 것 같다. 뭔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난 못마땅하다. 그냥 나 답게 일하고, 그 자체로 평가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욕심이다. 세상은 내게 특별히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러 봐달라고 하지 않으면 봐줄 이유도 여유도 없다. 뭐 진짜 올라가고 싶으면 못 이기는 척 정치라는 것도 해볼 수는 있겠는데, 사실 조직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가고 싶은 맘 자체가 아직은 별로 없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직장인으로 오래 살긴 글러먹었다. 요즘 그래서 더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있다. 혹시 나중에라도 글 써서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커버 이미지: Photo by Carles Rabad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