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혁재 Aug 02. 2020

기러기 아빠 좋은 아빠

나는 지금 역기러기 아빠다. 일반 기러기 아빠와 반대로 아내와 아기는 한국에 있고 나는 미국에서 홀로 돈을 벌고 있는 상황이다. 비록 시한이 한 달 남짓으로 정해져 있는 시한부 역기러기 아빠이긴 하지만 말이다.


미국의 코로나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전혀 없다. 그래서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딸아이와 아내를 한국에 보내고 싶었다. 아직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도 손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기다림도 간절했다.


마침 7월 중순에 드디어 딸아이의 여권이 나왔다. 독수리 여권. 여권을 손에 쥐자마자 아내는 한국행 비행기를 앞당겨 변경하고 곧 한국으로 향했다. 같이 가고 싶었지만 나는 아직 8월 하순까지 근로계약이 돼 있어서 남기로 했다.


돈 많이 벌어서 보내줄 테니 한국 가서 맛있는 거 많이 사 먹어~.

7월  26일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아내와 아이를 떠나보냈다. 아기가 1월 5일에 태어났으니까 거의 7개월 만에 처음으로 아이와 떨어진 것이다. 그 사이 단 하루도 아기를 보지 않은 날은 없었다. 특히 코로나 때문에 집 밖을 거의 안 나가게 된 이후, 아이는 24/7 항상 내 반경 20 미터 안에 있었다. 그런 아이를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보내는 마음은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홀로 2주간 자가 격리하며 육아를 해야 할 아내가 걱정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아기의 상태가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반대로는 가뿐한 마음도 들었다. 마침 마무리돼 가고 있는 회사 프로젝트에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가 없으면 부담 없이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터였다. 역시 세상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빼앗아간다.




내가 잠시나마 역기러기 아빠가 되고 나니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내 아빠 엄마의 마음을 그려보게 된다. 우리 아빠와 엄마 두 분도 한 때는 기러기였기 때문이다.


2003-4년 내 아빠와 엄마는 서로 반대편에 있는 기러기였다. 아빠는 나와 형을 데리고 미국에서 살면서 연구실에서 일하고 계셨고, 엄마는 한국에서 홀로 일하시면서 생활비를 보내셨다. 아빠가 하는 일은 당시 교환교수 형태로 연구실에서 아주 작은 돈만 받고 일하며 배우는 것이어서 생활비를 충당할 소득원이 못 되었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 자식들을 먹여 살린다는 의미에서는 엄마가 기러기였고, 어찌 됐든 타지에서 애들을 돌보면서 일까지 한다는 점에서는 아빠가 기러기였다.


그때는 몰랐다. 기러기가 된다는 게 아빠 엄마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 희생이었는지. 아빠는 반드시 한국에 살아야 하는 분이시다. 많은 아저씨들이 그렇겠지만 하루라도 한식이 없으면 안 된다(나도 아저씨가 되니까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한국이라면 돈도 많이 벌고, 말도 잘 통해는 환경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아빠였다. 그런데 자식들 교육 때문에 1년이라는 시간을 미국에 남아 견뎌야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 인생에서 참 낮은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어가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 가장으로서 해결해야 할 생활 측면의 일들이 모두 스트레스였고, 소통이 잘 안되니 근무 성과도 잘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빠의 퇴근은 칼 같았다. 그나마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집으로의 칼퇴근을 매일 조바심 나게 기다렸을 아빠의 마음이 이제는 머릿속에 그려진다.


반대로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평생 바쁘게 일하느라 형과 내게 많은 시간을 못 써온 아빠였다. 그렇다면 그때 미국에서 주어진 1년이란 시간을 더 소중하게, 가족적으로 지낼 수는 없었을까. 형과 내가 사춘기 시기라 그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아빠는 우리의 생각이나 학교 생활, 어려움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셨다. 있으셨다고 해도 물어보지 않으셨으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생을 살면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으셨다.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은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나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같은 것들 말이다. 아빠는 언제나 신앙이 가장 먼저인 사람이었다. 오직 신앙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므로, 하나님이 다 보살펴주실 것임으로 아버지가 우리에게 따로 대단한 지도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주님 앞으로 데려가면 그뿐. 그게 아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셨다. 지금도 변하지는 않으셨을 거다. 자식 입장에서 이건 부모역할의 아웃소싱으로 느껴진다.


실행의 아웃소싱은 책임까지 아웃소싱 시킨다. 기러기 아빠라는 것도 결국 돈 버는 것 외 다른 육아에 대한 실행과 책임을 아내에게 아웃소싱 하는 것이다. 비록 자식을 위한 결정으로 포장된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으며, 우리 부모님이 아주 좋은 분들이란 건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기필코 더 좋은 부모가 될 것이다. 평가는 딸에게 받겠다.




이번에는 코로나라는 특별한 상황 때문에 잠시 가족과 떨어져 기러기 아빠가 됐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가족과 떨어져 있지는 않을 작정이다. 잠시라도 한 번 떨어져 보니 알겠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니 알겠다. 비록 모든 부모는 자식을 위한다는 이유로 많은 선택을 내리지만, 그 의도와 결과는 너무도 다를 수 있다는 걸. 중요한 건 더 좋은, 비싼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 긴밀한 교감과 사랑이라는 사실을. 험한 세상 살면서 필요한 건 신앙에 대한 막연한 의지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직접 물려주는 지혜와 노하우라는 것을.


내가 우리 부모님보다 더 좋은 부모가 되는 게 어쩌면 가장 큰 효도일지도 모르겠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Kelli McClintock on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