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O(최고 재무책임자)가 전체 메일을 보냈다. 이번 분기 Glint 설문조사에 꼭 참여해달라는 당부였다. Glint는 조직의 인사관리를 돕는 설문조사를 만들고,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인적자본 관리 솔루션을 제공하는 실리콘밸리 기업이다. 몇 해 전 LinkedIn이 4천억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인수하기도 해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우리 회사는 분기마다 이 Glint 설문조사를 전사 1만여 명의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그 결과를 인사관리 및 조직 문화 발전에 활용하고 있다. 설문조사 응답에 꼭 시간을 할애해 달라는 이메일은 CFO만 보낸 게 아니었다. 내가 속한 조직의 상무, 본부장, 이사 등도 연이어 비슷한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덕분인지 결과적으로 이번 분기 설문조사 참여율은 90% 정도였는데, 큰 회사 규모를 고려하면 상당히 높은 참여율이라고 한다.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 익명으로 진행되는 조사이기 때문에 누가 참여를 했는지 아닌지를 알 방법은 없다.
설문조사는 회사 만족도, 커리어 만족도, 업무 만족도, 문화 만족도 등의 여러 파트로 구성돼 있었다. 각 파트마다 5-7개 정도의 질문에 답하도록 설계돼 있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현재 회사 생활에 전반적으로 만족하십니까? (1-7점 사이 선택. 서술형 답변 기재 가능)." 내 경우 전체 설문조사를 마치는 데 20분 정도면 충분했다. 질문마다 자유롭게 코멘트를 달 수 있게 돼 있어서 마음먹고 쓰자면 한없이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귀찮아서 서술형 답변은 굳이 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정기 설문조사겠거니 했다. 하지만 과거를 되돌아봐도 내가 전에 일했던 (한국) 회사들은 이런 비슷한 질문들을 내게 한 번도 물어봐준 적이 없었다. 자기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 불만족 사항은 뭔지, 어떻게 하면 더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지 직접 직원들에게 물어봐 주는 게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 아닌가? 물론 그때는 그런 게 상식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지금 와서나 그렇게 느낄 뿐. 원래 회사라는 곳이 상식을 바라서는 안 되는 곳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이곳은 그런 상식이 통하는 곳임을 처음부터 체감할 수 있었다.
단순히 상식만 통하는 데서 끝이 아니라는 건 설문조사 바로 다음 주에 드러났다. 이번엔 팀장, 이사, 본부장 등이 순서대로 회의를 소집했다. 설문조사 결과에 대한 공유와 의견 수렴을 위한 자리였다. 개개인의 답변은 익명이지만 조직별로 합산된 결과는 투명하게 공개되었고, Glint는 이를 벤치마크와 비교해 각 팀, 부서, 본부 등이 어떤 부문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었다.
내 직속 매니저이기도 한 우리 팀장은 벤치마크보다 점수가 낮은 우리 팀의 점수 항목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팀원들에게 추가적인 의견과 아이디어, 해결책을 구했고, 이사와 본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말하기 힘들면 익명으로 말해달라며 익명 게시판도 개설하는 등 설문조사 결과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토론은 여러 번 이어졌고, 위아래 없이 터놓고 조직문화 개선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일종의 위로 같았다. 이런 모습은 매 분기 예외 없이 반복된다.
어쩌다가 한 번 하는 설문조사도 아니고 매 분기마다 하는 설문조사를 팀장부터 CFO, 결국에는 CEO까지 어떻게 이렇게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저 "원래 우리 조직은 분기말에 바쁠 수밖에 없어. 워라벨이 상대적으로 나쁘다는 의견은 하루 이틀 있어온 게 아니야. 어쩌겠어? 그래서 돈 많이 주잖아?" 하고 대충 위로의 말만 전하거나 연말 보너스 등을 언급하면서 "으쌰 으쌰, 힘냅시다!" 하고 말 수 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이게 단순히 우리 회사의 특징인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는 문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걸 알아보려면 이곳저곳 옮기면서 다양한 회사들에서 일해봐야 하는데, 아직 그럴 마음이 없어서다. 내가 항상 설문조사에 답하는 대로, 나는 지금 회사에 매우 만족하고 있고 거의 매일 행복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