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좀 무섭다
LLM 기반의 챗봇형 AI가 주목받기 시작한 이후, 많은 기업들이 AI를 기업이 살아남을 중심 가치로 설정했다. 물류, 재고 예측이나 백오피스에서는 제법 성공적인 성과를 낸 곳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프론트단에서, 즉 고객과 만나는 접점에서는 대부분의 서비스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AI를 ‘조금 더 똑똑한 채팅’ 수준으로만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AI가 우리 서비스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감을 못 잡았다고 생각한다.
국내에서 눈에 띄는 성공사례를 떠올려 보려 해도, 자동응답 기능을 고도화한 수준 이상의 성과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AI는 채팅을 위해 개발된 기술이 아니다.
이 새로운 지능은 점점 더 사람의 사고와 행동을 대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기능을 넘어, ‘행동하는 주체’로 발전하고 있다.
AI의 물리적 제약을 지우는 하드웨어는 무시무시하지만, 긍정적 사고를 위해 소프트웨어 단계의 AI만으로 범위를 좁혀봐도, 대부분의 '처리'들은 자동화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장보기, 금융·세무 업무, 각종 예약이나 문의 처리 등은 앞으로 AI가 직접 수행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환경 하에서 디지털 서비스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
이 흐름을 생각해 보면 다음 변화의 파장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디지털 환경이 생성되어 오프라인에서 하던 일들이 디지털로 대체되던 시기가 있었다. 이 변화의 시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은행 문을 두드릴 필요 없이 모바일로 송금하고, 동대문에 가기보다 온라인 쇼핑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상가들은 역할을 찾지 못해 축소되고, 온라인 상점들이 성공을 보장하는 필수 요소이던 시기였다.
디지털 환경이 발전되어 어떤 일을 하기에 오프라인보다도 편리해진 시기가 있었다. 불필요한 입력 항목이 많았던 이체 신청서처럼, 오프라인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불편함들이 디지털 서비스에서 점차 사라졌다. 디지털에서는 간단하게 이체할 수 있고, 물건을 둘러보거나 장을 보기도 더 쉬워졌다. 보험에 가입하거나 주식을 거래하는 일에 있어 기존에 하던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편의를 얻었다.
그러던 디지털 서비스는, 데이터 처리 기술의 발전으로 사용자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마이데이터 기반의 서비스들은 사용자 특성, 취향, 맥락을 파악해 탐색 시간을 줄이고 처리 효율을 높여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디지털 채널은 “정확한 타이밍에 원하는 것을 추천하고, 최단시간 내에 처리하는” 구조로 완성되어 왔다.
하지만 AI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 지금까지 변화해 온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매달 사는 생수를 ‘정확히 추천받아 최단시간 안에 다시 구매’하는 과정조차 의미 없어질 수 있다.
곧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라벨 없는 삼다수 1.5리터 최저가 찾아 30개 주문해 줘.”
그리고 AI는 사용자의 환경, 소비 패턴, 상황에 맞게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품의 탐색경험, 구매 경험, 추천 경험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질까? 디지털 서비스 자체는 고객 접점을 잃어갈 것이 뻔해 보인다.
이 과정에서 많은 디지털 서비스는 AI가 중간 과정을 대체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이름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AI 에이전트와 더 잘 연결되고,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혹은 조금 더 부정적인 예측도 가능하다.
AI를 ‘잘 속여서’ 더 높은 가격에 상품을 팔거나, 비효율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서비스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사용자가 직접 검색하고 탐색하며 물건을 고르고 구매하거나, 필요한 처리를 수행하는 행위가 줄어든다면,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편리한 서비스를 만드는 데 들이던 노력은 줄어들 것이다. 들어와서 볼 일이 없으니까.
AI는 정보를 빠르게 분석하고 의도를 파악해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위한 정교한 UI/UX는 점차 덜 중요해질 수도 있다. 오히려 ‘AI가 알아보기 쉬운 구조’, ‘API 기반의 정보 응답’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예상되는 네 번째 디지털 서비스의 변화는 앞선 세 단계보다 훨씬 급진적일 가능성이 크다.
AI 에이전트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서비스의 ‘사용성’은 더 이상 차별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배달 가능한 마라탕집 중, 평가 상위 30% 안에 드는 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를 주문해 줘.”
이 한 마디로 AI가 모든 과정을 처리하는 시대가 온다면, 사용자 경험은 사람이 아닌 AI를 위한 구조로 완전히 전환될지도 모른다. 그때, 진짜 경쟁력은 더 이상 ‘사용자 편의’가 아니라 사용자 '경험의 감정적 가치'가 될 것이다.
이 격변의 환경에서도 모든 서비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구매 자체’보다 ‘과정의 즐거움’에 가치를 두는 경험은 여전히 살아남을 것을 쉽게 예측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옷을 고르고, 착장을 구경하고, 찜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사는 그 일련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용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구매는 처리해야 할 업무가 아니라 하나의 놀이이자 경험이다.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은 AI가 ‘처리’할 수 없는 앞단의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서비스에서 AI는 예상된 착장 이미지를 생성해 보여주거나 사이즈를 추천하는 식으로 기능할 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은 (실제 구매 버튼은 AI가 누르더라도) 디지털 서비스에 여전히 의미 있는 역할을 줄 수 있다.
대부분의 금융 서비스는 업무처리를 위한 tool로 기능하고 있다. 토스가 주장하는 [더 쉬운 금융]은 사용성을 뜻하는 말로 곡해되어 왔다. 그러나 [처리가]더 쉬운 금융은 글쎄, 쇼핑보다는 오래 걸리겠지만 곧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지출을 직접 확인하고, 계획을 세우고,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행위 자체에서 보람을 느낀다. 이들에게는 AI가 알아서 돈을 관리해 주는 서비스보다, 직접 관리하는 경험 그 자체가 더 중요할 수 있다. AI의 지원은 여전히 유효하겠으나, 돈 관리에 대한 즐거움 자체를 뺏기고 싶어 하지 않는 사용자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최종 의사결정을 행하기 전에 스스로 현황을 확인하고 분석하려는 사람 역시 다수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디지털 금융 서비스는 단순히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경험하고 싶어 하는 감정, 즐거움, 통제감에 더 주목해야 한다.
무서운 것은 이 변화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구현 가능한 기술이며,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디지털 서비스는 이제 단순히 더 빠르고 편리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AI 시대에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서비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는 소리다. 이런 개념에 대해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하는 서비스는 설 자리가 줄어들 것이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소름 돋게 무서운 시기가, 문 앞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