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3배, 이스라엘의 314배
최근 미국계 글로벌 데이터센터 기업의 임원과 한국의 AI 인프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AI 경쟁력의 핵심은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라며, 한국의 데이터 전송 환경이 글로벌 경쟁력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AI는 결국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에 달려 있으나, 한국의 높은 데이터 전송료는 한국의 AI 경쟁력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2022년 기준, 한국의 모바일 데이터 전송료는 1GB당 평균 12.55달러에 달합니다. 이는 일본(3.85달러)의 3배, 이스라엘(0.04달러)의 무려 314배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미국(5.62달러), 독일(2.67달러), 중국(0.41달러), 프랑스(0.23달러)보다도 높습니다. 데이터 전송료는 단순한 통신비가 아니라 AI, 클라우드, 콘텐츠 산업의 실행 비용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이 격차는 기술 격차보다 더 근본적인 AI 산업 확장 격차를 만듭니다.
한국의 데이터 전송료가 비싼 이유는 시장 논리보다 제도 설계의 문제에 있습니다. 콘텐츠 제공자에게도 별도의 망 사용료를 부과하는 이중 과금 구조, 통신 3사의 과점 체제, 제한된 도매망 개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에서는 트래픽이 많을수록 비용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결과적으로, 많이 쓸수록 손해 보는 인프라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글로벌 스탠다드인 망중립성(Net Neutrality) 원칙과도 배치됩니다. 망중립성이란 네트워크 사업자가 트래픽이나 콘텐츠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다뤄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은 이 원칙을 바탕으로 CP들이 자유롭게 데이터 서비스를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고용량 트래픽에 대해 추가 비용을 요구하면서, 글로벌 서비스가 한국을 기피하게 만드는 구조를 스스로 만든 셈입니다.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 간의 소송은 이 문제를 대표적으로 드러냅니다. 트래픽 급증을 이유로 약 270억 원의 망 사용료가 청구되었고, 넷플릭스는 한국 내 CDN 구축 대신 화질 조정과 해외 우회 전송으로 대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용자 경험은 저하되고, 글로벌 기업은 한국을 인프라 확장의 우선순위에서 배제하게 됩니다. 데이터 흐름에 제약이 많을수록, 기술은 멀어지고 기회는 줄어듭니다.
AI의 핵심은 데이터의 처리에 있습니다. 대규모 학습, 클라우드 기반 연산, 외부 API 연결 등 모든 기술의 전제는 빠르고 안정적인 데이터 전송에 있습니다. 전송 비용이 높고 속도가 느리면, 아무리 좋은 모델이 있어도 실행 비용은 급격히 올라갑니다. 지금의 구조는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환경의 한계입니다.
중국과 일본은 이 문제를 정책적으로 풀고 있습니다. 중국은 전국적 인프라 확대와 요금 억제를 통해 AI 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있습니다. 일본은 망중립성 보장, 도매망 개방, 자유로운 CDN 설치 등으로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의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인프라에 대한 정책적 시선의 차이가 결국 산업 속도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한국은 기술력과 시장 잠재력은 충분하지만, 인프라와 제도 측면에서는 여전히 경직된 구조에 머물고 있습니다. 통신 3사의 과점과 설비 투자 회수 중심의 수익 모델은 혁신보다 안정적 수익을 우선시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스타트업은 확장을 주저하고, 글로벌 기업은 진입을 유보하게 됩니다. AI 경쟁력은 규제보다 연결의 자유도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이터센터의 지방 분산이 해법처럼 제시되지만, 실제로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제안입니다. 수도권 대비 백본망, 전력, 광케이블 품질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단순 분산은 전송 지연과 추가 비용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분산은 지리적 거리보다 전송 효율과 글로벌 연결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위치보다는 구조가, 거리보다는 흐름이 중요합니다.
예외적으로 부산은 주목할 만한 전략적 인프라 거점입니다. 부산은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과 직접 연결되는 아시아 해저케이블 허브로, 국제 트래픽의 핵심 노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 연결성이 확보된 지역은 단순한 분산이 아니라, 국제적 네트워크 중심지로 성장할 가능성을 가집니다. 데이터센터는 ‘어디에’보다 ‘어디로 연결되는가’가 핵심입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이 흐름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동북아 거점은 일본, 동남아 거점은 태국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는 비용 경쟁력에 더해, 정부 정책, 연결성, 유연성의 종합적 판단에 따른 결과입니다. 한국은 기술력은 충분하지만, 인프라 설계와 제도 유연성 면에서 점차 후순위로 밀리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따라잡으려면, 산업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 먼저입니다.
AI는 컴퓨팅과 알고리즘 경쟁이 이전에, 데이터 흐름의 경쟁입니다. 알고리즘보다 먼저, 그 알고리즘이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는 데이터 전송 인프라 경쟁력부터 갖춰야 합니다. 한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하려면 기술보다 먼저, 데이터가 막힘없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AI는 연산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연결로 완성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