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로 보는 태국인의 감성
방콕 오피스를 처음 방문하던 날이었습니다. 몇 년 만에 다시 온 방콕이지만 내리쬐는 태양과 후덥지근한 무더위는 기억 그대로 포근했습니다. 방콕에 대한 익숙함과 새로움에 대한 설렘이 날줄과 씨줄로 엮이면서 첫출발을 했습니다. 이때, 당시 태국 법인장은 저에게 특별히 부탁 하나를 하셨습니다.
태국 사람들은 숫자보다 감성에 강합니다. 숫자는 우리끼리 논의하고, 직원들과는 더 감성적인 얘기를 많이 나누었으면 합니다. 태국의 광고를 한번 봐주세요.
그래서 태국 광고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태국 광고는 정말 기발했습니다. 짧은 광고에 내러티브, 감동, 병맛, 반전과 여유가 한꺼번에 어우러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광고는 얼핏 보면 뻔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유명 연예인을 쓰거나, 후크송에 따라 할 만한 춤을 반복하거나, 신선한 카피 한 줄로 승부를 보려 하거나 또는 셋을 다 활용하려는 광고가 대다수였습니다. 물론, 한국 광고도 최근 들어 바뀌고 있습니다. 제품 기능과 특징을 내세우기 바빴던 기존 광고가 스토리텔링과 B급 감성을 버무려 감성적 광고로 접근하고 있고, 패러디, 뮤지컬 등 다양한 시도로 재미를 추구하며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태국 광고는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 결과, 태국은 국제 광고제를 휩쓸고 있습니다. 세계 3대 광고제 중 하나인 칸느 국제광고제만 살펴봐도 태국은 아시아내 상위권 국가입니다. 한국의 저조한 실적과는 확실히 대비됩니다.
[아시아 퍼시픽 국가별 칸느 국제광고제 수상 실적]
다양한 광고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광고는 '감동'을 전달하는 태국 텔레콤 회사인 <TrueMove H>의 2013년 브랜드 광고였습니다. "베풂이 최고의 소통입니다 (Giving is the best communication)"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3분짜리 광고입니다. 광고는 아픈 엄마를 위해 약을 훔치는 소년으로 시작합니다. 주인이 도둑직을 한 소년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다른 가게 주인이 약사에게 돈을 쥐어주고, 소년이 음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30년 후, 소년을 도와준 가게 주인이 갑작스레 쓰러지고, 병원비로 큰 금액이 청구되었지만, 딸은 이내 병원비가 지불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비는 30년 전에 도움을 받았던 소년이 주치의가 되어 되갚은 것이었습니다. 트루는 '더 빠른, 더 저렴한' 등의 '기능'으로 소구 하던 기존 통신 시장에 '감성'을 통해 브랜드 스토리를 전달하는 영리한 방식을 택했고, 그 결과 시장 점유율이 급증했습니다.
‘감동'은 실화를 통해 드러날 때 배가되기도 합니다. 유니레버의 선실크 2018년 광고는 샴푸를 통해 태국 트랜스젠더의 삶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친구,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도전받던 소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기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머리카락이 1cm에서 5cm로, 그리고 28cm에서 47cm로 자라면서 소년의 정체성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BeThatGirl 캠페인은 2017년 미스 티파니 대회에 참여한 주인공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더 큰 감동을 주었고, 태국스러운 광고를 만들어 냈습니다.
'감동'과 또 다른 접근은 '병맛' 코드입니다. 태국 광고의 정수는 '병맛'의 유머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수많은 광고 사례가 있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광고는 태국 'Chaindrite' 회사의 살충제 광고입니다. 2019년 칸 광고제 필름부문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한번 뿌리면 '바로 죽는다'라는 스토리를 말 그대로 병맛 유머로 풀어냈습니다. 모기와 바퀴벌레를 퇴치하는 과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이 광고는 무표정한 배우의 연기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는 광고입니다. 'B급 광고'의 모범 사례로 불릴 정도로 유명해진 광고입니다.
또 다른 태국 광고의 매력은 '반전'입니다. 남자가 서랍에서 와플을 꺼내 먹으려던 순간, 여자 친구가 들어옵니다. 남자는 재빠르게 와플을 등 뒤로 감추고, 여자는 고백할 것이 있다며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 비밀을 드러냅니다. 남자는 여자를 껴안으며 "서로 사랑한다면 비밀이 있으면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 몰래 뒤에 무언가를 비밀스럽게 숨기며 광고가 끝나게 됩니다. 이 광고는 <몬드 닛신(Monde Nissin)>의 <보이즈 와플 (Vois Waffle)> 광고입니다. "와플은 애인과 공유하기에는 너무 맛있다"는 메시지를 반전과 유머로 녹여냈습니다. 매우 창의적인 이 광고는 2018년 칸 라이언즈 필름부문 골드 라이언상을 수상했습니다.
‘반전' 코드의 매력은 비꼼 속의 재치에 있습니다. 2019년 넷플릭스가 태국에 광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보여준 '나르코스의 센서십'이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태국 당국의 센서십 규정은 까다롭기로 유명합니다. 규정을 따르자면 나르코스의 대부분 장면은 삭제되어야 합니다. 이를 모자이크 처리하면서 해학으로 풀어낸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대놓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만들었고, 태국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태국 광고이기도 합니다.
태국 광고는 말 그대로 창의적입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태국의 다양한 광고 에이전시 출신 전문가들과 얘기를 나누어본 결과,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광고주의 간섭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광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명확하게 합의되면, 그 다음부터는 광고 에이전시가 주도적으로 진행한다고 합니다.
이후, 태국에서 광고를 만들 때, 같은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당시 오길비 태국 법인장 출신이었던 CMO애게 ‘감동', '병맛', '반전'의 특색을 잘 살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만, 크레이티브는 철저하게 CMO와 에이전시에 맡겼습니다. 2019년 12월 광고가 출시되었을 때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1주일 만에 조회수가 천만을 돌파했고, 빠르게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었습니다. 제가 관여한 첫 번째 광고였지만, 실제로는 광고 예산 결제를 승인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기여를 한 것이 없었지만, 최고의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당시 태국 법인장의 부탁이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 미팅에서 태국 광고를 많이 봐달라는 그 요청 말입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태국 광고가 창의적인 이유가 광고주의 간섭이 적기 때문이듯, 태국 사업의 성과를 위해서 본사의 관여를 최소화해달라는 요청일 수도 있겠다는 점입니다.
태국의 문화는 묘하게 일본과 닮아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표면의 말속에서 숨겨진 진의를 찾아야 합니다. 태국 광고를 보며, 저는 태국 문화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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