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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May 24. 2024

반짝거리는 사람

24.05.09. 산책하기 좋은 밤에

거의 날마다 글을 쓰게 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어가는데, 아직도 글을 쓰려면 어색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에게는 내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가는 과정이 반갑게 느껴진다. 오늘은 내게 있었던 기억 중 한 조각을 쓰려한다. 


 대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신입생 연주회가 있었다. 그 연주회 준비로 매일 저녁 큰 연습실에 모여 다 같이 합주 연습을 했다. 그리고 악기별로 무대를 하나씩 더 해야 해서 독주나 합주 무대를 설 학생들 대상으로 오디션을 봤다. 나는 거기서 오디션을 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동기 중 한 명이 내게 전화를 해서 대금 동기 학생 4명 중 한 명은 오디션에 나가야 하니 자기들은 싫고 내가 나가주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떠밀려서 억지로 산조 악기를 들고 교수님들 앞에서 오디션을 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어쩔 수 없지, 하면서 늘 외우고 있던 산조로 당차게 오디션을 봤는데 나중에 교수님이 다시 나를 불러서 그렇게 무대에 나가면 어떡하냐며 혼이 났다. 시무룩하게 교수실을 나서는 내게 교수님께서는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된다!'라고 호통치듯이 감싸주셨다. 


 산조로 오디션을 치기 전에 내게 도움을 주었던 선배가 있었다. 같은 서용석류 대금 전공 선배였는데 단체 연습 중에 내게 오더니 털썩 주저앉고는 '산조 한번 불어봐라' 하고 말했다. 그 말에 잔뜩 쫄았던 1학년의 나는 긴장한 채로 산조를 불었다. 선배는 앞부분 진양만 잠깐 듣더니 서용석류는 더 강하고 거칠게 불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그렇게 불었다. 그렇게 잠깐 도와주고 간 4학년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는 알고 보니 연습을 아주 열심히 하던 학생이었고 연습실에 거의 붙어살듯이 하고 있었다.  늘 텅 빈 학생회실에서 산조를 연습했는데 소리가 듣기 좋아 나는 가끔 지나가다 가만가만 듣고 있었던 적이 있다. 사물함 때문에 연습실을 한 학기 동안 자주 오가다 보니 그 선배를 매일 볼 수 있었고 선배는 학생들이 연습을 잘하지 않는 주말에도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연습을 응원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선배의 팬이었던 나는 졸업 연주회까지 찾아가 관람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조금 울었다. 


 연습을 많이 한 것 치고 악기가 빨리 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월화수목금토일 매일 나와서 표현 하나씩 강박적으로 붙들고 집중해서 연습을 하는데 같은 학생으로서 보기에는 연습 속도가 조금 더뎠다. 물론 내가 응원하는 사람이라 더 빨리 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긴 했지만, 그때의 내 감상은 그렇다. 그런데 졸업연주회에 가서 들은 곡들은 모두 그 연습 시간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성의 있게 연습한 티가 났다. 반복해서 불던 표현들은 결국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요성 하나하나 다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말끔하게 들리는 소리는 분명히 많이 소리 내고 불었던 사람의 소리였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 듣고 응원했던 연습이 저렇게 들리는 것을 보고 나는 저런 연주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단해지지 않아도, 엄청난 업적이 있는 게 아니어도 매일 나와서 연습을 한 사람은 결국 저렇게 부단히 곡을 만들어 멋지게 불어낸다. 음악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연습하던 그 선배를 보고 나는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다. 매일 연습실에서 지치지도 않고 연습에 집중하던 모습은 꼭 악기 소리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연습이 되지 않으면 몇 번이고 반복하는 모습은 열정이 넘쳤다. 선배는 연습할 때 반짝이고 있었다. 연습실에 매일 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늘 나와 악기를 만지고 불어내고 다시 반복해 연습하는 일은 아주 힘들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그 일을 매일 해내는 모습을 나는 조금 부러워했다. 그리고 그렇게 연습할 수 있는 마음은, 그 마음은 분명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매달려 해내려고 노력하는 일은 그것을 마음을 다해 대하는 일이다. 나처럼 대금 소리를 좋아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연습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습실에 꾸준히 나갔던 나는 감탄하면서 계속해서 들리는 대금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졸업 연주회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멋있다고, 당신 너무 반짝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낯가림이 심해서 마주치면 인사만 꼬박꼬박 한 사이라 직접 말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전해주고 싶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연주였다고 말하고 싶었다. 


 마음을 다해 대한 것은 결국은 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선사한다. 끊임없는 노력은 그 사람을 지나치지 않는다. 부단히 사랑하고 헌신해서 보낸 그 마음은 그 앞에 어느 순간 결과를 가지고 나타난다. 어느 멋진 순간은 그렇게 태어난다. 그런 마음을 비춰 보인 노력을 직접 볼 수 있어서 기뻤다. 학부 생활 동안 연습을 혼자 하느라 외롭고 지치는 시간이 많았는데 나는 그때마다 그렇게 연주하고 간 그 선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보인 반짝거리는 순간도, 그리고 멋진 연주도 마음에 담아 두었다. 나도 그렇게 언젠가 반짝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도 주말을 제외하고는 연습실에 늘 나왔었는데 그게 습관이 되니 주말에도 아침부터 나가 있게 되었다. 늘 반짝였던 한참 위의 선배처럼, 나도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 연습을 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연습을 하는 게 루틴이었는데 병원에 다녀온 후 일찍 일어나지 못해 아침 연습을 잠시 그만두었다. 어제는 악기를 모두 꺼내 물에 한번 씻고 청을 새로 붙여두었다. 이제 슬슬 연습할 시간이다. 청성곡을 만들려고 하는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쓴다고 몇 년 전의 기억을 꺼내 보았는데 마음을 움직였던 기억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제 색깔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떤 연주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어주었는데, 허락 안 받고 올려도 괜찮을까. 어디서 어떤 연주를 하건 여전히 응원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오늘도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이 분다. 악기 불기 좋은 날씨인데, 나도 좋은 기억을 다시 꺼내보았으니 내일부터는 다시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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