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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대금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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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이 Jul 29. 2024

어느 연주자의 이야기

24.07.29. 늦은 밤에

 졸업을 하고 시립 악단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기간에 용돈 벌이를 하기 위해 간단한 단소나 소금, 대금 과외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수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선생님께 찾아가 배우고 있다. 그래서 어릴 적 배웠던 5관청 잡는 법을 다시 배워서 악보를 익히고 있는데, 세상에 그 악보에 든 노래가 수백 곡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악보를 갖다가 전부 훑어볼 생각으로 자리에 앉아 한 곡 씩 불었다. 머리가 띵해질 때까지 달아 연습을 하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이 두꺼운 악보 책을 다 볼 수 있을까, 하고 자기 한탄을 하게 된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산조나 정악곡을 부는 느낌과는 다른 민요나 동요, 옛날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만한 가요를 불고 있으면 이게 뭐야, 싶어서 만만하게 보고 연습을 하지 않게 되고 만다. 그래서 오늘은 억지로 힘을 내서 연습실에 가 겨우 악보를 펴고 2시간가량 불다 왔다.


 취미로 대금을 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다니던 학원에 가끔 있었다. 나와 레슨 시간이 겹치지는 않지만 종종 마주치면 그분들은 내가 부는 소리를 들으면 멀찍이 서 뒷짐을 지고 한참 동안 구경을 하다가 잘 분다며 박수를 쳐 주고 지나가시곤 했다. 나는 그런 박수 소리를 무척 달갑게 여겼는데, 그래서 나도 그분들을 가만 보고 있으면 대금이라는 악기에 대한 마음이 나만큼 간절하고 애정이 넘친다는 생각을 했다.


 산조는 원래 전문 음악인이 하는 음악이다. 그런데 학원에서는 산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취미반 선생님들이 많아서 단체로 아마추어 공연을 할 때도 다 같이 무대에서 불기도 하는데, 내가 힘겨워하는 산조를 무척 힘찬 표정으로 불고 배워나가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게 여겨진다. 악기는 저런 사람들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연습실에 갇혀 있으면 당장 공연하거나 시험 칠 음악도 아닌데 뭐 하러 연습하는가, 싶을 때가 많다. 그렇지만 악기를 집어 들고 불어 보면 나도 모르는, 내 안에 있지도 않던 때 아닌 음악 소리가 난다. 그 과정을 나는 여러 번 반복한 편인데 솔직한 감상으로는 갇혀있는 곳에서 들리는 그 소리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래서 취미 레슨을 가끔 옆에서 구경하다 보면 저 사람들은 그런 자기만의 소리를 좇는 연주자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갇혀 있다고 말하기는 싫지만 사실상 내가 있는 연습실은 사방이 막힌, 갇힌 곳이 맞다. 일본 소설 <꿀벌과 천둥>에서 피아노를 치는 소년 가자마 진은 갇힌 음악을 바깥으로 내보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가 말한 갇힌 음악이라는 말이 내 생각처럼 물리적으로 갇힌 것을 표현한 말은 아니겠지만 나는 순간 머리 속 한 켠에 있던 연습실이 떠올랐다. 갇힌 곳에서 연주하는 사람은 그런 갇힌 곳을 들을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바쁘고 활기있게 요동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신이 만든 그 음의 파장을 듣고 있으면 연습실을 갇힌 곳이라고 표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빛깔로 빛나는, 열정 넘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곳은 그저 음을 담아주는 소중한 공간일 뿐이다.


 연습실이 아니면 방 안, 넓은 거실, 창이 열려있는 교실에서 악기를 연습하다 보면 누구에게 들릴 것이 아니어도 악기를 다루고 그 소리를 듣는 일이 즐겁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끔 쓸쓸해질 때도 있겠지만, 온전히 그 소리의 빛을 들을 수 있다면 묵묵한 마음을 다 밝혀주는 악기 소리를 알 수 있다. 분명히 그렇다. 어쨌든 취미 레슨을 하려고 마음먹으니 그런 생각들이 밀려온다. 그리고 2백 페이지는 족히 넘어가는 민요, 가요 악보를 읽고 있자니 머리에 산소가 꽉 막힌 채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다.


 갇힌 곳에서의 소리도 충분히 빛난다. 내가 몇 년 동안 연습을 하면서 느낀 감상은 그렇다. 그리고 아마추어든 프로든 연주하는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아닌 지금 연주하는 음악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연주자는 다 같은 마음을 가진다. 그 일이 자신의 직업이든 배우고 연주하는 유희를 위한 것이든 악기를 대하는 마음은 모두 같다. 그러니 나도 오래 불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늘 성실하게 음악을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즐길 때는 즐기고, 성실해야 할 때는 분명히 다시 있으니 그때는 그렇게 해 주면 그만이다.


 언젠가 내가 가르쳐 준 음악으로 그렇게 즐겁고 맑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되면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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