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인터넷 어딘가 내가 모르는 다크웹의 한 구석에는 이런 페이지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고.
<도둑들을 위한 호구 안내서>
거기엔 이런 식의 정보가 올라 있을 것이다.
*8구, 샹젤리제 대로의 속옷 가게 : 귀가 어둡고 동작이 굼뜬 나이 많은 마담 상주. 레벨 하.
*1구, 생 오노레 가의 향수 가게 : 눈을 고양이 같이 뜨고 미소로 맞이하는 젊은 직원 상주, 가짜 미소 주의. 레벨 상.
*3구, 퐁토슈 가의 옷 가게 : 불어 못하는 아시안 상주, 말귀 못 알아듣고 웃음 잦음. 레벨 최하.
이쯤 되면 나는 이미 그들 세계의 전설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휴 도둑놈님들 어서 오세요. 마음껏 훔쳐 가시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실수와 선의를 착각하며 살아온 인간 호구 3호쯤으로.
그날, 알록달록한 모카신을 신은 모녀가 가게에 들어왔다. 엄마로 추정되는 여자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옷에 대해 질문을 하던 순간 '아, 저번에 왔던 집시구나!'하고 알 수 있었다. 저 공동(空洞)과도 같은 새카만 눈, 마음이 읽히지 않는 저 눈을 밤마다 떠올리며 나는 얼마나 많은 이불킥을 했던가.
그간 친구들로부터 도둑이 들어왔을 때에는 소리 지르거나 같이 싸우지 말고 조용히 나가게끔 유도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었다. 특히 평온하다가 갑자기 폭주하는 내 성격을 잘 아는 한 친구는 걱정을 많이 했다. 도둑이 다시 찾아와 해코지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날, 작정하고 그들 옆에 붙어 있었다. "이건 어때요?" 물으면 "글쎄요." 하는 식으로 시큰둥하게 그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결국 그들은 포기한 듯 가게를 나갔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몰래 사진으로 남겼다. 낡은 파란색 자동차에 올라타 떠나는 순간까지, 그들의 뒷모습이 내 심장 안쪽 어딘가를 긁고 지나갔다.
파란 자동차가 사라진 후, 이번엔 아프리칸 아저씨가 찾아왔다. 인생이란 마치 "오늘은 어떤 인간 시험을 통과하실 건가요?"하고 묻는 게임 같았다. 그는 낡은 영국산 바버 재킷에 네모난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프리칸 아저씨가 와이프의 옷을 산다고 하면서 한국옷을 파는 가게에 오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내가 본 파리의 아프리칸 마담들은 아프리칸 패브릭으로 만든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과 프랑스의 여자들이 입는 옷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는 <도둑들을 위한 호구 안내서>의 한 줄을 떠올렸다.
"3구의 아시안 판매원은 인류애와 죄책감을 동시에 앓고 있음. 도둑에게도 예의를 잃지 않음."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물건을 훔쳐 나갔고, 며칠 뒤엔 친구까지 데려왔다. 그때 가게엔 나 혼자였다. 나는 차분히, 그러나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 문을 닫아야 합니다. 나가주시겠어요?"
그들은 나를 슬쩍 보더니 느릿한 걸음으로 나갔다. 만약 내 손에 프라이팬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의 등을 한 번쯤 내려쳤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 나는 핸드폰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찍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손이 떨렸다. 나는 맞은편 식당으로 달려가 이웃들에게 울며 말했다. 이해해 주는 이웃의 손길은, 경찰보다 따뜻했다.
그 일을 겪고부터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가게의 손님은 잠재적 도둑이었고, 지하철의 사람들은 모두 소매치기였다. 사람을 믿는 일은 점점 사치가 되었다. 마음에 빠르게 금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인 가족이 들어왔다. 언제나 쾌활하고 밝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건을 잘 사는, 내가 가장 반기는 미국 손님들이 오면 그날은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그들은 액세서리를 착용해 보고, 웃고, 떠들고, 그리고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그런데 정리하던 중 스카프 하나가 사라진 걸 깨달았다. 이젠 의심이 반사신경처럼 발동됐다.
"도둑 너 새끼 걸려만 봐라."
나는 가게 문을 잠그고 그들을 쫓아나 섰다. 카페와, 근처 편집숍에도 물었다.
"그런 사람 봤어요?"
드디어 그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당신이 착용했던 스카프가 사라졌습니다. 혹시 어디에 두었나요?"
그 여자는 당황하며 가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여태껏 자신을 따라온 거냐고 나를 질책했다. 심증은 확신으로 번졌다. 그 순간, 그녀의 딸이 말했다.
"그거 아기 요람 같은 데 두었을 거예요."
그제야 기억이 번쩍 들었다. 가게 한구석의 빈티지 요람. 착용했던 스카프를 그곳에다 던져 놓았던 것이다. 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그저 "오 마이 갓"만 반복했고, 엄마는 "그 사람 파리 여행 망쳤네."라고 하면서 혹시 고소당하는 거 아니냐고 나를 걱정했다.
며칠간 문을 여는 일조차 두려웠다. 사람을 의심하는 일보다 사람에게 미안해하는 일이 더 고통스러웠다. 그리곤 결심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생겨도 쫓아 나가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이 자리를 빌려 당신의 파리 여행을 망친 일에 대해 사과합니다. 당신을 도둑놈으로 의심해 미안합니다."
퇴보인지 진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둑들을 위한 호구 안내서>는 이제 이렇게 정정되어야 한다.
*3구, 퐁토슈 가의 옷 가게 : 불어 서툰 아시안 판매원 상당히 개화됨. 눈치도 빨라짐. 더 이상의 도둑질은 불가하다 오버.
나는 오늘도 그 안내서의 오탈자를 수정하며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