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믿지 마세요
그녀는 은근슬쩍 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다. 무리한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당연하다는듯이 눈 딱 감고 밀어붙이기로 한 것 같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변명하고 둘러댔습니다. 양해를 구하는 대신 무책임한 핑계를 댔습니다. 순간순간 묘한 말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왜 이럴까?
문제의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 등 자신 이외의 세계로 떠넘기는 것은 현실의 자신을 마주하기가 두려워 회피하는 것이다. 즉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 나는 사소한 일에 화를 낼까? / 가토 다이조, 추수밭, 2015
새처럼 작은 그녀도 중년이 되었습니다. 맑은 하이톤의 목소리는 땍땍거리며 시끄러워졌습니다. 그녀는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하고 복잡하고 힘든 일은 피해버립니다. 모르는 척 생까는 것이 그녀가 습득한 삶의 방편 같습니다. 적당한 가면을 쓰고 여전히 쾌활하게 살지만, 중년의 그녀는 약간 뻔뻔하고 강해졌습니다.
밝고 쾌활한 모습은 그의 진짜 성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방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쾌활함이다. 그의 쾌활한 행동의 동기는 불안과 외로움이다. 그는 늘 사랑을 원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 마음에 들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쾌활한 척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있다.
왜 나는 사소한 일에 화를 낼까? / 가토 다이조, 추수밭, 2015
그녀는 알뜰한 살림꾼입니다.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안전한 일상을 꾸려갑니다. 직장에서 손해볼 짓은 결코 하지 않으며 이익은 반드시 챙깁니다.
서둘러 퇴근한 집에는 오직 가족으로부터 위안을 받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집안일도 있습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비켜갈 골목길은 많습니다. 이와 비슷한 가정의 화목함을 가토 다이조는 현실을 잊기 위한 허구의 인간관계라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그녀들만 거슬리고 싫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 불편해지면 안보고 살았습니다. 서로 다치지 않는 제일 안전한 방법 같았죠. 문제는 항상 뒤통수에 그 기억하기 싫은 얼굴이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못견딜 사람은 맞짱 뜨고 깔끔하게 선긋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속은 시원하지만 개운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너 하나 잘라내도 나는 끄떡없다며 씩씩거리지만 나중에 생각하면 내가 미쳤구나 싶었습니다.
삶에 지친 나이가 되어 남탓을 멈추고 다 내 탓이라 해보기도 했습니다. 진심으로 " 내 탓이다." 하고 싶었지만 "나만 잘못한 건 아니잖아." 하는 마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송곳 같은 미움이 튀어 나와서 저의 결심을 가로막았죠.
청년과 장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제 마음은 골병이 들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마음을 다스리고 산다고 착각도 했습니다. 사실 제 속은 헝클어진 실뭉치를 그대로 둘둘 말아 내던져놓은 것 같았습니다. 오직 나 하나의 안녕을 위하여 60 평생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가 이런 것입니다.
기억은 퇴색하기 마련이라는데 왜 나쁜 기억은 갈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뇌를 가득 채운 불행의 기억, 고통에 빠뜨렸던 기억은 상처를 극복하라고 뇌가 보내는 메시지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나, 확대된 나로 거듭나라는 말이다. 자꾸 떠오르는 기억이 ‘나’를 확장하라는 메시지임을 알아야 한다. 아프다고 외치기만 해서는 병이 낫지 않는다.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 /김재현, 컨텐츠 하우스, 2011
몇 년 전에 큰 오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이좋게 지내려고 노력했던 행동 하나하나를 상대방은 모두 곡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그가 솔직하게 속을 털어놓으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너무 억울하고 기가 차서 눈물이 다 났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볼 수가 있냐' 며 욕을 했습니다. '니가 그런 놈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하는 욕은 속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곧 인정이 되었습니다. 잘 지내려던 저의 노력은 진심이 아닌 억지였습니다. 내가 니같은 놈에게 어떻게 했는데... 싶었지만 억울해할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프다면 전복죽을 갖다주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을 겪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제멋대로고 사람의 눈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 내가 그런 오해를 받았듯이 나도 숱한 이를 오해하고 살았을 거라는 것, 내 머리 속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오해하고 곡해한 파일이 즐비했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규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겪어보니 알 수 있었습니다. 저처럼 기가 차고 억울해서 눈물 나는 사람이 한 둘일까 싶었습니다.
기억은 우리 생각처럼 정확한 것도 아니고, 불변하는 것도 아니다.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퇴색되고 욕망에 따라 윤색된다. 눈과 귀를 통해 뇌에 입력되는 순간부터 ‘사실’은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꺾인다.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 /김재현, 컨텐츠 하우스, 2011
믿지못할 인간이 저였고 저의 판단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좀처럼 알기 힘든 이유는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 믿음을 고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례하고 뻔뻔한 사람은 그녀들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한참 잘못된 저를 뜯어고치는 것이 순서였습니다.
상대방에게 요구만 했지 나는 상대방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이 한 가지만 깨달아도 대부분의 신경증은 분명 좋아진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들은 이 한 가지를 깨닫지 못한다.
왜 나는 사소한 일에 화를 낼까? / 가토 다이조, 추수밭,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