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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꽃 Aug 30. 2019

인간의 마지막 모습 5가지,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죽음을 보면 삶이 보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청아, 2012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될지 그 선택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단지 '어떤 태도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만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딱 살아온 만큼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명상은 곧 삶에 대한 명상입니다. 


누구의 죽음이든 그 자리는 경건했습니다. 알 수 없는 차원에 대한 경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다 가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늘 있었습니다. 죽음과 늙음에 대한 성찰은 자기 인생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죽음1 - 체념


병원에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마지막 모습은 체념입니다. 

"살아봐야 소용없다, 무신 소용있노. 죽어야 될낀데... 안 죽는다."
"죽고 짚다, 세상이 구찮다. 언제 죽겠노?"

저는 소심하게 결론을 내려 봅니다. '사람은 대책 없이 살다가 대책 없이 죽는 존재다.' 


죽음2 - 두려움


병원에 와서 처음으로 보게 된 죽음은 두려움이었습니다. 허허벌판에 홀로 누워 갈피를 못잡았습니다. 초점없는 눈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고, "무서워,무서워.." 읖조리는 몸은 진땀에 젖었습니다. 어쩌면 늘 두려움 뒤로 숨었던 삶인지도 모릅니다. 극복하면 사라지는 두려움의 속성을 한 번이라도 경험했더라면, 한 번이라도 용기를 내어 부딛쳐 봤다면 좋았을걸...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3 - 집착과 원망


세상 사람이 다 죽어도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은 믿음을 사람은 가지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만 사람은 그런 생떼을 부립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를 방문했던 날, 그녀는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복수가 차고 몸은 마를 대로 말랐죠. 건강할 때의 너그러움과 우아함, 여유와 유머는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오직 암을 치료하겠다는 집념만이 그녀를 지배했습니다. 그녀의 병실 냉장고와 베란다에는 먹지도 못할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수감자들의 정서가 완전히 메마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 2012


그녀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날 눈을 감았습니다. 삶에 대한 집착,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매달려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마지막까지 절박하게 삶에 매달렸습니다. 삶의 끝으로 가는 원숙함도, 훈훈한 마무리도, 태어나 살았던 세상에 대한 감사함도, 마지막 미소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이며, 죽음은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죽음4 - 독단과 권위


이것은 노인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나이의 문제도 아니고 학력의 문제도 아닙니다. 못말리는 젊은 꼰대가 있고, 의료계나 법조계에서도 흔히 발견되며, 직장 상하관계에서는 십중팔구 경험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이 병원에 올 때부텀 거가 내 자리다! 나오너라! 내 자리다!" 못말리는 어르신은 오늘도 당신 하고 싶은대로 고집을 부리십니다. "우리 집안에 국회의원도 있다. 윗대 조상은 ..." 수도 없이 들었던 집안 자랑을 또 하십니다. 


코로나19로 요양병원은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비접촉면회를 하죠. 어르신 한 분이 야단이 났습니다. 코로나고 나발이고 문을 열라는 겁니다. 아들은 "우리 아버님, 원래 저러세요."했습니다.


뒷목 잡게 만드는 어르신을 보면 나는 절대 저렇게 늙지 않으리라 결심합니다만 결심한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미성숙함은 크게 돌아보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죽음5 - 후회


후회 1

나는 세상에 났어도 넘 되도록 못살아봤다. 
하고 싶은 말은 하도 많아 목이 메여 못합니다. 
세월아, 어서 가자. 

이 어르신은 결국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었던 일도 못했습니다. 


후회 2

나는 돈이 많아. 그거 못써보고 온 게 제일 한이 돼.

그나마 말이라도 하던 그녀의 병세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돈으로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은 입원비뿐입니다.  


후회 3

그녀는 일이 징글징글하다 했습니다. 밥 한 숟가락 뜨면 산이고 들로 나물 하러 다니고, 남편은 나무를 해다 장에 팔았다 합니다. 그러다 골병들어 죽었다 했죠. 평생 놀아본 적이 없는 그녀입니다. 뜨개질을 시작하면 손가락 뼈가 아프도록 하고,  박수를 치면 어깨가 아프도록 죽어라 칩니다. 그녀의 평생은 전쟁터처럼 바쁘고 힘겨웠고, 마지막에는 그저 습관이 되어 바쁘고 힘겨웠습니다. 돌덩이처럼 막힌 마음을 단 한번도 풀어 헤치지 못한 채 이젠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계십니다. "가슴이 왜 이리 답답하냐, 다른 병원에 좀 데리고 가봐라" 고만 하십니다.


후회 4

인지가 있는 분들은 가슴속에 많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묻어두고 가십니다. 뭐가 남아 있는지도 모른 채 아쉬움도, 꿈도, 어리석음도, 후회도, 잘못도, 부끄러움도, 어리석은 자존심도 다 안고 갑니다. 이런 내가 싫다 하면서도 익숙해서 편해진 것일까요?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외면하는 무책임과 게으름일까요? 더 이상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일까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일까요?




가수 나훈아가 "테스 형님" 을 부르는 바람에 소크라테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너 자신을 알게 되었을까요? 교만과 허세를 돌아보게 되었을까요? 내 인생은 내 것이니 내가 잘 안다, 내가 알아서 살겠다는 만용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을까요? 


죽음은 자본주의가 불편해하는 단어입니다. 내일의 삶을 위해 끝없이 소비하는 대중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죽음을 기피합니다만 단 하루도 죽음의 뉴스가 없는 날은 없습니다. 물론 내가 죽는다는 상상은 하지 않습니다. '내 발로 걸어 다니다가 자는 잠에 가고 싶다'는 말도 안되는 희망을 품고 있을 뿐입니다. 집 밖에서 죽겠다고 결심한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분들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십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행복한 삶을 바라지만 불행의 이유를 돌아보기는 귀찮아 합니다. 평화로운 죽음을 원하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돌아보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두려워하고 못본 척하고 피하기만 하죠. 


인간을 아름답게 미화할 생각이 저는 없습니다. 인간의 치부를 숨기는 것이 인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눈만 제대로 뜨면 절망스러운 인간의 모습은 수두룩하게 발견됩니다. 그나마 다 망가지지 않고 요만큼이라도 말이 들리고 생각이 온전한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너무 늙고 너무 굳어서 너무 안 들리는 꼰대가 되기 전에 불편한 진실을 바라볼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용기가 절반의 시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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