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되는 지름길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 껍질부터 못깨는 사람은 또 그런 늙은이가 된다. 저 사람을 욕할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저 꼴 밖에 될 수 없었던 걸, 바로 너희 자리에서 너희가 생각 안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쓴 맛이 사는 맛> 채현국(구술), 비아북, 2015
대충대충 살았던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드니 두려웠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저에게도 비위맞추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말 안통하는 노인이란 증거겠죠. 채현국 어르신은 까딱하면 저 꼴 된다고 노인을 "봐주지 마라" 하십니다. 자신을 끝까지 옹호하고 변명하는게 인간인데, 저도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요?
20대 초반까지는 말 잘 듣는 딸이었죠. 어린 눈에 엄마와 삐걱대는 언니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이스크림 쭉쭉 빨며 "말 한마디만 조금 잘하면 될 텐데 왜 저러지?" 생각했답니다. 멋모르고 시작한 인생, 뜨거운 맛을 모를 때는 삶이 쉬워 보입니다.
그러던 제가 집안의 화근이 되었습니다. 살벌했던 70년대에 겁도 없이 이념에 목숨을 걸기로 한 것이죠. 이념 갈등으로 집안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화장실에서 울고, 형제들은 집구석을 시끄럽게 만든 저에게 인상을 썼죠. 아버지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고 저는 가족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아니, 모든 세상이 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미움과 절망이 깊어질수록 불에 덴듯한 상처가 마음 구석구석에 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는 억울하고 아픈 일이 얼마나 많던지요.
대학 졸업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엄마는 집안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저는 엄마의 기둥이었고요. 벗어나려는 딸과 붙잡으려는 엄마가 갈등을 빚어내고 있었죠. 저는 가족이 저의 굴레라 생각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세상 탓, 남 탓을 했습니다. 남탓이 제일 쉬우니까요. 굴레를 벗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매일 원망에 갇혀 살게 되겠지요. 눈흘기는 노인이 되어서 말이죠.
결혼을 안한 저는 엄마와 집을 지켰습니다. 40이 되던 해,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고 전셋집을 얻어 독립을 했습니다. 쌍방의 의존적인 관계가 정리되고 저는 제 인생에 집중하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엄마도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운동을 시작했죠. 아프면 당신만 서러워지니까요. 그렇게 엄마와 저는 각자의 인생을 책임지기 시작했습니다.
타인의 인생을 책임지려는 오지랖은 거두는 것이 옳았습니다. 가족에게 최선을 다한 결과는 대개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족을 위해서 어떻게 했는데.. 나에게 이럴 수가 있냐?" 가족이야말로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건강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동생들은 저를 살짝 원망했습니다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건 동생의 문제입니다. 제가 집을 지켜야 자기가 자유롭겠죠. 제가 끝까지 엄마와 살았다면 온 식구를 들들 볶았을 겁니다. "너희들 때문에 내 인생은 없었다" 배배 꼬인 노인이 되는 것이죠.
저는 교육에 인생을 걸었습니다만 무모한 꿈이었습니다. 사람은 내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 하나를 배우고 교단을 떠났습니다. 무엇보다 '제 뜻'이라는 것이 모호하고 미심쩍기 짝이 없는 것이었죠. 더는 가르칠 게 없다고 느껴질 때쯤 명예퇴직 신청을 했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시달렸던 아이들, 그 아이들을 맡긴 학부모들께 정말 미안했습니다. 아니 생각할수록 끔찍했습니다. 뭘 제대로 배운 게 있고 아는 게 있다고 그렇게 땍땍거리고 살았을까... 저의 강한 의지와 집념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한 번의 연애도 있었고 그 덕분에 사랑의 감정에서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남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 밑바닥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 사랑은 끝없는 소유욕이었습니다.
퇴직을 하고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다시금 의욕에 불탔습니다. "이 복잡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나의 인생 후반기는 비로소 빛이 나지 않겠는가. 나는 필시 대기만성형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시련도 많은 것이다." 루쉰의 <아큐정전> 아시죠? 저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저를 합리화하며 정신승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명상을 하기 전에는 제가 이렇게 아집이 강한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양보하고 희생한 인생인줄 알았죠.
제가 무너져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꺽이고 무너지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도 남을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인간이었을 겁니다. 자기 자신말고는 안중에 없는 인간이 타인의 가치를 알 수는 없습니다. 좌절이 없었다면 나의 결심만 중요하고 나의 가치만 소중한 못돼먹은 노인이 되었을 겁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생 말년에 우연하게도 시골의 작은 병원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사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곳이죠. 숱하게 피고 지는 꽃처럼 많은 분이 돌아가시기도 했습니다. 가끔 돌아가신 분과 살아계신 분이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분, 돌아가셨던가? 아닌가?" 흔해빠진 것이 사람의 죽음이고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인간이었습니다.
요양병원은 미뤄둔 숙제가 모여있는 곳 같습니다. 돈이 해결되지 못했으면 매일 돈 이야기를 합니다. 욕구가 이성에게 남은 분은 휠체어에 의지하고도 아무 여자나 집적입니다.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분은 말 대신 욕을 하고 발길질 주먹질을 하시죠. 두려움을 회피하신 분은 낮이고 밤이고 무섭다는 말만 하십니다. 나보다 가진 사람 부러워하고, 나보다 잘난 사람 앞에 기죽고, 나보다 못한 사람 무시하고, 타인이 보내는 작은 관심에 뿌듯해 하고, 가족이 오면 안심이 되고... 그러다 그마저도 다 잊어버리죠.
매일 보는 죽음과 늙음이 두려웠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길이었죠.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많은 죽음을 보면서도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끔찍함과 허망함을 이겨내고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될까봐 조급했고 미친듯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질병이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내 맘대로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정글의 법칙>에서 축구선수 이영표도 개고생 끝에 고백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자만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게 된 시간이 감사했습니다. 아니면 필시 철없고 경망한 노인이 되었을텐데.
선택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기 달라지는 일' 뿐이었습니다. 내가 달라지는 게 싫어서 남이 달라지기를 원했죠. 내가 달라지는 일이 어려워서 손쉬운 남 탓과 원망을 선택했고요. 마치 내 잘못은 없다는 듯이 얍삽하게 꼰대의 길을 걸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