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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꽃 Mar 06. 2019

나를 괴롭히는 기억이 있다면

등산길의 마음수련 명상


3월 초하루, 밤낮없이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산길을 걸었다. 얼음은 다 녹았지만 산중의 풍경은 겨울이나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겨울 패딩을 입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기미년 그날도 이리 쌀쌀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홑껍데기 치마저고리 입고 거리를 나서 만세를 불렀을까. 백 년이 흘러도 기미년의 상처는 건드리면 아프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천지가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모여있어 가던 길을 멈추었다. 개구리가 연못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제 짝을 부르는 소리로 산중이 요란했던 것이다. 지난여름 그 많던 올챙이들이 죽지 않고 충실하게 살아남았다. 지치지 않고 맹렬하게 울어대는 개구리를 보면 살아남는 종족은 그만한 이유가 있고 자격이 있는 것 같다. 



산길 곳곳은 사람의 바램과 기원으로 넘쳐났다. 구석구석 어디라도 돌탑을 쌓아뒀다. 보잘것없는 돌멩이 하나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다. 저 돌 하나마다 간절한 기도가 보태어졌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옛날에는 산길에 호랑이가 나타날까 봐, 혹은 무섭고 두려운 목숨을 지켜주십사 빌었을 것이다. 이후로도 끊임없이 산아래 인간사가 무병 무탈하기를, 지금보다 조금 더 안락하기를 빌었을 것이다. 


나는 기복을 비는 대신 허세를 부리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 일쯤이야 하면서 배포 좋게 웃어넘기고 그 정도 일이야 인생 다반사지 하며 넘겼다. 겉은 그러하나 사소한 상처와 아픔은, 내밀한 두려움과 공포는 밑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이 나이에 더 바랄 게 있겠냐고 허풍을 떨지만 가슴 깊은 곳의 아련한 기다림과 바램은 결코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의 사연은 제각각이고 기막히고 각별한 것이다. 그러나 죽을 날 받아놓고 보면 이일 저 일이 다를 것도 없다. 병이 되어 가슴을 쥐어뜯을 만큼 꾹꾹 눌러 참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낡은 포대기 아래로 하고 싶은 말 다 숨기고  "나는 괜찮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여" 하는 분들께 그딴 소리 하지 마시라 하고 싶다. 


버럭 고함지르고 주변 사람 못살게 구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고약하게 굴지 않아도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용기를 내어 당신의 상처를 내보이면 다정하게 손잡아줄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슬슬 피하면 당신은 행복하시냐고 말이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채 생을 마무리하기가 아깝지 않으시냐고, 마지막 숨 몰아쉴 때 눈물 나지 않으시겠냐고 말이다. 그런데 너무 늦은 것 같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말이다. 



과거의 기억은 분명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나 기억은 팩트가 아니다. 주관적인 해석이다.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면 그건  불행했다는 기억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 기억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과거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일까? 불행의 기억이 아니라 그것이 선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면 과거를 바꾼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죽고 싶을 때도 생기지만, 사람은 기억의 기능이 있어서 되짚어 돌아볼 수도 있다. 과거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달라진다면 트라우마도 사라질 수가 있다. 왜곡된 기억에 속지 말고 돌아보는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큰소리치지 말자. 우리는 모른다. 과거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가 달라지지 않는다.


고통은 강물에 가라앉은 침전물처럼 그저 가라앉았다. 그리고 대개는 그 강물을 휘젓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어르신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에게 먼저 던져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너는 과거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너는 기껏 고요해진 강물을 휘저어 온통 구정물이 되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너도 모르는 척 덮어두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은가. 과거의 아픈 기억이 떠오르면 더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쉽지 않은가. 너는 진정 기꺼이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자신을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너는 진정 행복해질 용기를 내고자 하는가.


산길 옆으로 잘 다듬어 깎아 올린 3층탑 하나가 하늘을 향해 서 있다. 족히 천년은 그렇게 서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저 쌓아 올린 돌탑이 한 마리 새처럼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나도 돌탑처럼 바라보기만 하고 서 있는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아로새겨진 기억이 화석처럼 굳어진 나의 마음을 본다.  어릴 적 부모님과 형제들, 선생님과 친구들, 물펌프가 있는 마당이며 국숫집이 있던 시장과 골목길, 수없이 되새겼던 그곳의 사연들... 삶이 무거운 것을 한탄하며 가벼운 것을 동경하고 바라기만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정신 차리고 직면하지 않았다. 숨기고 싶은 뭔가가 튀어나올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안타까운 사람은 어르신이 아니라 나였다. 과거는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내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돌아보는 마음수련 명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버리는 마음수련 명상을 해야했다.


......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박경리 <산다는 것>에서 발췌 / 박경리 유고시집, 2016,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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