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에 대한 명상
화장이 짙은 교장선생님이 봉사활동을 가셨다. 요양병원으로 가는 아이들과 교사들을 따라나선 것이다. 아픈 노인을 보면 누구나 생각이 많아진다. 교장선생님도 그랬던 것 같다. "아유~저는 절대로 이렇게 안되고 싶어요. 내 힘으로 살다가 자는 잠에 가고 싶어요"
병원에 계신 어느 누구도 이런 식의 노환이 계획에 있었거나 희망한 사람은 없다. 아니 나만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은 분들이시다. 나의 모친도 치매를 가장 두려워했고, 당신은 결코 그런 병을 앓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친은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낯선 시간 속으로 우리 모두는 걸어가고 있다. 삶을 직선으로 본다면 퇴로는 없다. 허락된 것은 앞으로 가는 길 뿐이다. 늙음은 스러짐이고 그보다 무서운 것은 질병을 동반한 늙음이다. 죽음과 맞닿아 있기에 더욱 낯설고 두렵다.
치매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닐지언정, 늙음은 누구에게나 부지불식간에 찾아오고, 그때부터 자신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늙음을 나를 지배하는 수직관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열등감이 생기게 된다. 반면 늙음을 자연스러운 나의 친구 즉 수평관계에서 대등하게 바라보면 열등감이 생기지 않는다. 고요하고 평온하게 늙어가는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늙어갈 용기> 기시미 이치로, 에쎄, 2015
나에게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중년이 꿈결같이 왔다 갔고, 이어 노년이 왔다. 대개 죽음이나 이별 등의 심리적 위기를 맞으면 먼저 '부인'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늙음도 그런 것 같다. 마음은 지나간 젊음에 머물러 있거나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현재를 잘 보려들지 않는다. 나이도 잊고 바삐 살다가 어느 날 "내가 벌써? 말도 안 돼!" 하게 된다.
내가 지금도 늙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다. 막연히 기대했던 노년의 수준이 지금의 나와 너무 다른 것이다. 늙은 나에게 관조, 여유, 평화, 관용, 지혜.... 그런 건 거의 없다. 나이만 들었지 여전히 인생에 대해 모르겠고, 철이 든 것 같지도 않고, 어쩌면 젊을 때보다 더 심하게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고, 혹은 비겁해지고 삐지고 싸우고 화해도 못하고 서툴다. 경험치는 수십 년이 쌓였는데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어서 나이를 모르겠다.
굳이 늙음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육체라는 물질적 변화를 만나면 그렇다. 좋던 시력이 나빠지면서 돋보기를 쓰게 되고, 치아가 변색되고 임플란트를 하기 시작하며, 청력이 나빠져서 "뭐라고?"라고 되묻게 되는 것이다. 돋보기, 보청기, 틀니를 언젠가는 조우할 날이 온다. 가는 귀가 먹은 만큼 마음도 굳어버린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실상은 어쩌고 저쩌고만 들었지 내용은 하나도 들은 게 없을 때도 많아진다. 기억도 가물가물해진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늙음의 징후는 도둑처럼 스며든다.
"너 몇 살이야? 너만 한 손주가 있어, 내가!"
"에미 애비도 없냐? 버르장머리 봐라, 아주... "
세대 간의 갈등이 생기면 흔히 듣는 말이다. 늙은 사람 눈에는 왜 젊은이들이 다 싹수없어 보일까? 우리가 부모에게 뭘 잘한 게 있고 윗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아니면, 더럽고 때로 억울해도 꾹 참고 살았던 까닭일까? 나는 억울해도 순종하고 희생했는데 늙어서까지 참아야 하는 것이 분한 것일까?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 새로운 시대의 당돌함에 당황한 것일까? 나는 너희처럼 자유롭게 못살아 봤다, 이것들아.. 뭐 이런 질투일까?
늙음이 내 잘못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도, 벌을 받은 것도 아니건만 왜 기가 죽을까? 나도 한때 젊은이였는데 왜 젊음이 부러울까? 늙은이는 왜 꼰대 짓을 하고 미움받을 짓만 하는 걸까? 왜 쓸모없는 짐이 되어 구석으로 밀려난 것일까? 아니, 밀려나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부모 세대를 밀어냈다. "엄마, 제발 모르면 가만히 계세요!" 짜증 섞인 지청구를 안 해본 자식이 얼마나 될까? 나는 정말 많이 했다. "엄마, 좀... 제발.. 미치겠네..."
젊은이와 싸우지 않기
세대 간의 갈등은 필요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기원 전의 동양과 서양에서도 '요즘 것들'에 대한 개탄은 항상 있어왔다. 그 갈등을 건강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과제라면 과제다. 저물어가는 세대가 자신이 역사의 어디쯤에 서 있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조용히 비켜나기란 더더욱 어렵다. 대개는 구시대의 논리로 이기려 들고, 제압하려 들며,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 하고,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런 저항을 젊은이들은 꼰대라 한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노인의 가치만 인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참 게으르고도 염치없는 일이다.
1908년, 쇤베르크의 현악 4중주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되었다. 이는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큰 물의를 일으킨 연주회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행성에서 온 음악이 펼쳐지자 연주회장은 거센 반발과 야유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구스타브 말러가 일어나 청중을 진정시켰고, 쇤베르크에게 끝까지 갈채를 보냈다 한다. 언론은 공포의 실내교향곡이라 비난했지만, 그날 밤 말러는 이렇게 고백했다.
" 나는 솔직히 그의 음악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젊기에 아마도 그가 옳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이가 있어 그 음악을 이해할 귀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기시미 이치로, 살림, 2015
새로운 시대를 인정하기
학교에서는 주산을 배웠고, 직장에 다니면서 계산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어느 날 등장한 286 컴퓨터는 넘어야 될 큰 산이었다. 우리가 겨우 '야후' 검색을 하고 문서를 만들게 되자, 신규교사들은 PPT로 교재를 제작하고 발표했다. 그들은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손에 쥔 휴대폰 기능도 아는 게 몇 개 없는데 5G가 등장했다. 익숙한 것은 하나하나 사라진다. 보물 1호였던 카메라는 버려진 지 오래고, 새로 산 카메라의 사용설명서는 읽기를 포기했다. 에스컬레이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나는 무서웠다. 어느 어른은 편리가 불편리란 말로 문명 비판을 했다. 소심한 저항이었다. 늙어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그러나 늙은이가 할 일은 이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고 맡겨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과대 포장해가며 타자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투쟁 욕구를 절제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타자 앞에서의 겸손이야말로 공존의 조건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전제다. <늙어갈 용기> 기시미 이치로, 에쎄, 2015
늙음과 죽음을 수용하기
꼰대는 노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대의 문제다.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는 꼰대 상사와의 갈등이라 한다. 상사는 대개 노인이 아닌 중년이다. 나 역시 철벽 같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때마다 이걸 때려치워야 하나? 갈등했다. 내 삶을 낭비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반 지성적이고 반 상식적인 일들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이건 인간의 문제다.
자아성찰 없이 나이만 먹었다고 연륜이 쌓이지는 않는다. 그저 남에게 좋은 것만 보이고 싶어 하는 분들은 "나는 평생 잘 살았고 후회도 없다"라고 자랑하신다. 자신이 잘 살았다고 믿는 분에게 "아닐 수도 있자 않을까요?" 말 못한다. 펄쩍 뛰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이 입다물고 참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 주어진 시간에 자신을 진솔하게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은 명상으로 길러진다. 빈껍데기의 공허한 인생이 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명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연극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니까.
아들러는 말한다. "(늙어서도)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평범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먼저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바로 '자기 수용'이다. " (늙어갈 용기, 2015)
나도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 산전수전 겪다 보니 인간이 경험하는 온갖 심리는 내 속에도 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도 자신을 방치할 자격은 없다. 하루를 돌아보고 전 생애를 돌아보는 것은 기본적인 삶의 매뉴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명상, 명상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마음수련 명상은 자기를 돌아보고 돌아본 마음을 버리는 명상법이다. 그냥 내버려 두기에 삶은 너무 귀하고 아깝고 아름답다.
늙은이의 강점은 많이 살았다는 것이다. 오래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미리 알면 좋은 것들, 삶은 힘든 만큼 좋았다는 것을 젊은이에게 알려주기라도 하면 좋지 않을까? 악착같이 내 존재가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그때처럼이 아니다. 나를 내려놓은 큰 삶도 있다는 것, 작은 즐거움도 있지만 모든 것을 상쇄할 큰 행복도 삶에는 있다는 것, 삶이 늘 불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