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명상에 대하여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풍경이 있다. 통영 달아 공원에서 봤던 노을 지는 바다다. 하늘과 바다는 보랏빛 향연으로 어우러지고, 운무가 너울거리는 사이로 언뜻언뜻 작은 섬들이 선녀처럼 노닐고 있었다.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났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온몸에 흐르는 희열과, 슬픔도 기쁨도 아닌 무엇이 사무쳤다. 왜 그랬을까? 세상이 어떻게 그리 아름다울 수가 있었을까? 세상에 대한 헛된 희망이 어지간히 무너진 중년의 빈 가슴이라 그랬을까? 더러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눈물이 났다는 다른 이는 왜 그랬을까?
아우슈비츠에서 이송되는 도중에 호송열차의 작은 창살 너머로 석양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잘츠부르크 산 정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것이 절대로 삶과 자유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의 얼굴이라고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어쩌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곤 했다....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 2012
세상 물정 몰랐던 젊음이 사그라들고, 나는 세상사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어떻게 내 맘대로 된단 말인가.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알기까지 많은 세월과 좌절의 경험이 필요했다.
좌절을 겪고 나면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시간이 온다. 허무와 공허와 무기력이 찾아오는 것이다. 정처 없고 힘든 시간이었다. 내가 다시금 살기 위해서는 실종한 삶의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그때쯤 심취한 것이 문화재였다. 문화재는 나를 위협하지 않았고 배신하지도 않았으며 노력하면 찾아졌고 안전했다.
나는 5만 분의 1 지도를 훑으며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왜 그랬냐고? 찾으면 좋았으니까. 알려지지도 않은 지방문화재 한 점을 만나기 위해 험한 산기슭을 오르기도 했고, 길도 없는 길을 찾아 묻혀있는 보물을 만나기도 했다. 때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뒤져 알려지지 않았으나 눈 뒤집히는 문화재를 만나기도 했다. 그 기쁨만으로도 살아내는 힘이 되었다. 잡초 더미에 천년을 버려진 채로 서있는 탑 하나를 보며 나의 상처는 위로를 받았고 그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사랑에 미치면 물불 못 가리게 되는 것처럼 그런 것인가? 아님 극대화된 내 존재의 확인 때문인가? 이것은 또 다른 쾌락이었을까? 열정을 쏟아부었던 그 세월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잊는데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쩌면 현실이 두렵고 실패가 두려운 나에게 완충지대가 되어준 세월 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 2012
그즈음 수업을 꽤 열심히 했다. 별도의 교재를 만들어 서양미술과 한국미술에 대해 피를 토했다. 영상 문화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철커덕 거리며 돌아가는 슬라이드 필름을 보며 역사와 문화재와 정신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슬라이드 영상을 앞자리에서 보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질주했다. 와다닥 뛰어가는 아이들의 무리를 보며 선생님들은 이게 뭔 일인가 놀라기도 했다.
나는 어린 중학생들에게 8절지 시험지에 서술형 시험문제를 던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손을 달달 떨면서 답안을 메꿔나갔고 교실에는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 났다. 친구랑 똑같이 공부했는데 왜 점수 차이가 나느냐고 따지러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친구는 비장의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동료 선생님들은 나의 지독함에 혀를 내둘렀다만 그만큼 아이들과 나는 의기투합하여 열심히 했다. 여기까지는 스스로 뿌듯했던 한 때의 이야기다.
졸업한 아이들 중에 건축과에 들어갔다는 아이가 있었다. "누구 제잔데.." 라며 한국 건축의 맥을 이어 가겠다 말했을 때 나는 제자가 대견하기보다는 죽고 싶었다. 나의 공허함과 어설픈 대리 열정에 아이들을 동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아이들의 삶에 영향을 줬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다. 그게 뭐라고. 그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이며 기초적인 것을 나는 몰랐다. 몰라서 알려줄 수가 없었다. 나는 교사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어지면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명상을 하고 싶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눈감고 앉으면 눈물이 많이 났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서 절을 할 때도 있었다. 느리게 절을 하다 보면 더러 눈물도 나고 더러는 소멸되는 순간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이 우주에는, 사람의 마음에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어쩌면 나의 답답한 심사를 뚫어줄 답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질문이 있으니 답도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같이 마음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벗어나고 싶고 편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막연한 의문에 가득 차 있었을 뿐,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고 뭘 알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무모하게 찾고만 있었다. 이런 게 바로 나였다.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본 적이 없는 이상주의자, 뜻만 높았고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풀어내지 못했던 사회 부적응자, 나의 뜻은 바르고 옳지만 사회가 맞지 않아서 좌절했다 생각하는 핑계꾼, 그것이 나였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2012) 나도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른다. 나는 마음수련 명상이란 걸 알게 되었다. 방학이 되기를 기다려 마음수련 명상센터에 갔다. 지금은 메인센터가 논산 계룡산 자락에 있지만 그때는 가야산에 있었다.
명상이 어쩌고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첫 시간부터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먼저 돌아보게 하였다. 한 살에서 열 살, 스무 살.. 지금까지를 아주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게 하였다. 어설프게나마 영화 필름 보듯이 나의 삶을 지켜봤다. 영화 속에 기어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가를 반복했지만 처음으로 나를 떨어져서 보게 되었다. 평생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닦아 내었다.
부끄럽고 억울했고 슬펐던 마음들이 하나하나 버려지면서 나는 느렸지만 달라졌다. 몸과 마음이, 또 삶이, 사람과의 관계가 조금씩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루고 싶었던 나의 꿈과 희망도 버렸다. 세상은 그냥 살아도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스피노자의 말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 2012
거대담론은 항상 허황했다. 큰 것만 보려했을 때는 모래 하나, 먼지 하나도 세상을 품고 있음을 몰랐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을 벗어날 수 없었다. 물살에 나를 맡기건, 연어도 아닌데 굳이 거슬러 올라가건, 몸부림치건 달라지는 건 없었다. 거대한 물줄기는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숙제는 던져졌다.
거품이 많이 걷어진 나에게 주어지는 숙제는 작고 소소했다. 옆 사람과의 갈등 해결하기, 갈등의 원인이 나임을 깨닫기, 그래서 화해하고 사는 법을 배우기, 가끔 분노하게 되면 '그래서 뭘 해야하는가'를 빨리 찾기, 더러 지나치기도 하고 잊기도 하며 살기, 진흙탕 속에 있게될지라도 이것의 의미를 알아채고 기뻐하기, 즐겁게 일하고, 고맙게 밥먹고 살기... 그런 것이었다.
궁극의 행복은 어떻게 찾아질까? 통영의 달아 공원, 그 감동이 아무리 컸다 해도 해만 지면 달아 공원에 가서 앉아있을 수는 없다. 그저 그 한 때의 감동일 뿐이다. 젊을 때는 곳곳을 여행하는 즐거움도 누렸지만, 나이 드니 여행은 고생길이기도 하다. 뭔가를 경험해서 얻어지는 행복은 한시적이다. 물론 꿈결 같은 옛사랑의 추억처럼 고마운 기억으로 남기는 한다. 그러나 그런 추억으로 현재의 고통을 마냥 덮을 수는 없다. 허무하지 않을 행복은 어떻게 찾아질까?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시골이다. 사계절이 아름답고, 운무가 피어오르는 산자락은 항상 신비롭다. 오늘은 맑은 하늘과 산천이 너무 아름다워서, 햇살이 너무 따스하고 맑아서 푸른 하늘을 보며 벤치에 누워버렸다. 굳이 통영을 찾지 않아도 바람과 해와 하늘과 흰구름 만으로 충분하고 충분하게 행복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곳에서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천국과 지옥은 항상 왔다 갔다 하게 된다. 생겼다 말았다 하는 천국은 천국이라 할 수도 없다. 환각에 빠진 자가 간헐적으로 경험한 천국과 뭐가 다를까. 결국은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이 문제였다.
너무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은 너무 싫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좋은 것만 좋아하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다. 나를 위로해주는 것만 좋아하는 한, 나를 건드리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싫을 수밖에 없다. 이건 내 마음의 문제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르고 삶의 경험에 따라 다르다. 그 마음이 무엇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각자의 그 마음이 허상임을 알고 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버리면 너나가 달리있지 않은 하나인 세상이 있었다. 마음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선물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버려졌을 때, 변함이 없는 마음만 남았을 때, 모든 곳의 모든 시간은 행복할 것이다. 서툰 우리가 다시 상처를 주고받을지라도 그 마음은 버릴 수가 있어서 두렵지 않다. 그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으로 하루를 보낼 수가 있다. 불빛 없는 이 깡촌의 깊은 밤이 그저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