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자기 삶을 반복해서 돌아보고 버리는데 결과는 늘 달랐습니다. 돌아본 만큼, 버려진 만큼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마음은 양파껍질처럼 포장되어 있고, 없는 척하며 포대기로 덮여 있었습니다. 밑바닥 마음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못난 제가 버려져서 기뻤습니다.
마음수련 명상을 하면서 첫날 첫 시간 떠올렸던 기억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엄마가 준 10원으로 지우개를 샀습니다. 60년대에 지우개 값은 3원이었습니다. 제 짝이 교실 뒤로 저를 불러냈습니다. 거스름돈을 달라 하더군요. 달라하니까 줬죠.
약간 멍청한 저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거스름돈을 꿀꺽하고도 입을 꾹 다무는 딸을 보고 엄마는 간이 철렁했겠죠. 계단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빗자루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잘못했다고 울면서 빌었지만 뭘 잘못했는지는 몰랐습니다. 강렬한 첫 경험이었습니다.
느닷없이 떠오른 기억 때문에 엄청 울었습니다. 어린 제가 너무 불쌍하고 서러웠던 겁니다. 이것이 제 기억의 뿌리이고 의식의 원형이었습니다. 수많은 나날과 수많은 기억 중에서 제가 선택한 것이죠. 이 프레임으로 제 인생은 일목요연하게 해석이 되었습니다.
1)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2) 나는 완전한 피해자다 3) 모든 잘못은 외부에 있다.
아들러는 과거란 '지금의 나'가 부여하는 의미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의 과거는 달리 해석되고, 불쌍했던 제가 다시 보였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태도는 또 다른 인격을 낳았습니다. 사과할 줄 모르고, 고개 숙일 줄 모르고, 억울한 것이 많은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피해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었죠.
1) 남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 2) 그래서 자기 모습을 돌아보기가 참 힘든 사람 3) 혼자 잘나서 어울려 사는 즐거움을 모르는 인생
처음에는 삶을 돌아보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새롭게 이해되고 뭔가가 알아지는 것에 신이 났죠. 마음을 버리면서 아! 하고 깨쳐지는 기쁨도 컸습니다. 그러다 톱니바퀴에 낀 것처럼 정체되는 시간이 왔습니다. 뿌리 깊은 마음이 건드려진 것입니다. 젖은 장작 태우듯이 연기만 나고 눈은 맵고 타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진실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더는 알고 싶지도 않고, 버리기도 싫은 것입니다. 힘을 빼고 쉬엄쉬엄 반복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가족들은 몸부림치며 울지만 제삼자는 구경을 합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요. 그것처럼 자꾸 버리다 보면 자기로부터 벗어나 져서 인생이 덤덤하게 봐지는 단계가 옵니다.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본래 없는 마음을 내가 붙들고 살았구나' 싶은 것이죠. 이때가 되면 삶의 기억들이 송두리째 버려집니다. 우주비행사가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모든 것이 부질없듯이 그렇게 뚝 떨어져 보는 마음의 힘이 생깁니다. 이 멘털은 삶에서도 실력을 발휘하게 되죠. 웃고 넘어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버려진 자리에서 본성의 자리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자기 너머의 자기를 보는 것이죠.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일체의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그 즉시 여래를 보리라."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금강경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입니다.)
저의 밑바닥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를 지키고 변명하는 습관이 너무 깊게 뿌리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냉정한 사람인지, 사람을 싫어하는지, 또 이기적인지, 자기를 고수하고 지키려 하는지, 현재와 타협하고 안주하고 싶어 하는지 명상을 거듭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변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괴로워도 '이대로 좋다'라고 생각하는 걸세. 그리고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긍정할 수 있도록 '이대로 좋은' 이유를 찾으면서 살아가는 거라네
<미움받을 용기 2> 기시미 이치로, 인플루엔셜, 2016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냉정하게 보게 되니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사람과 갈등이 생기면 남을 탓하기 전에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차갑게 상대를 평가했던 눈은 '나의 차가운 눈'이었습니다. 둘째, 상대방의 모습은 제 모습이었습니다. 저게 어떻게 내 모습이냐 싶지만 분명했습니다. 똑같은 사람인 것이 인정되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푹 꺾입니다. 셋째, 저 사람처럼 나도 달라지기 힘든 사람입니다. 나는 달라지기 싫으면서 너는 달라져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상대가 달라지길 바라는 이기심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무엇보다 버리면 없어지는 마음을 두고 소모적인 정신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버려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관건입니다. 일단은 눈감고 단 1분이라도 명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를 포기하고,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고, '지금까지의 나'가 다시는 얼굴을 내밀지 않도록, 말하자면 무덤에 묻는 것을 의미한다네. 그렇게 해야 겨우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미움받을 용기 2> 기시미 이치로, 인플루엔셜, 2016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네. 우리가 의논해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뿐일세. '나쁜 사람' 같은 건 필요 없어. '불쌍한 나'도 필요 없고.
<미움받을 용기 2> 기시미 이치로, 인플루엔셜, 2016
처음에는 저 하나의 행복을 위해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성장하면서 저만 행복한 세상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고민은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함께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인가입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내가 행복한 건 좋지만 저런 인간이 행복해지는 건 싫더군요. 안 보고 살면 되지 내가 왜?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저는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모양이라서 좌절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의 밑바닥을 인정하는 통쾌함이 있었습니다. 인격에 대한 허영심이 무너지니 저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아주 시원하게 ㅎㅎ
그냥 살았으면 제 모친보다 더한 꼰대가 되었겠죠. 누구와도 소통이 되지 않고, 주변 사람 다 괴롭히고,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운 노인네 말입니다. 그러나 저같이 우둔하고 평범한 사람도 마음만 있으면 벗어날 수 있고,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인간은 언제든, 어떤 환경에 있든 변할 수 있어. 자네가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네.
생활양식(life style)을 선택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분명 자네는 후자를 택할 테지.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인플루엔셜,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