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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담자 P Mar 17. 2020

(전)워커홀릭의 익숙하지만 낯선 출근길

지금 이 순간을 가만히 느껴보기

지하철을 타면 내 시선은 늘 스마트폰에만 머물렀다. 출근길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든 잘 활용해보려고 애썼던 나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지금, 이 순간에 좀 더 집중해보기로 한다.

한강이 보이는 구간. 가 아는 그 풍경이지만 오늘은 좀 더 새롭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한강,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 해, 강 너머 희뿌옇게 보이는 산.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만히 어딘가를 바라보는 내 모습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쓰기 과제가 아니었다면 굳이 하지 않았을 일.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 아까웠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건물 사이사이로 비치는 강한 태양빛에 시 눈을 감는다. 을 감은 김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뱉어본다. 음이 차분해질 때 즈음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 스스로가 바로 서 있는 게 중요하고 내가 나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게 중요해.

마치 누군가가 앞에서 날 잡아당긴 것처럼 향도 모른 채 달려가던 삶이었다.  삶을 가만히 멈춰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본다.

그때 들려오는 안내방송.
"이 열차는 앞 차와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잠시 서행하고 있습니다."

앞 차와의 간격이라... 어쩌면 나는 조금의 간격조차 두지 않은 채 꼬리에 꼬리를 물듯 다음 계획과 다음 할 일들에 계속해서 집중하진 않았나.

간격, 서행, 표.
왜 필요한 지 몰라서, 사용하지 않았던 것.

지금 내 모습은, 간격을 두지 않고 다음 열차를 빠르게 움직이다가 모든 열차가 와르르르 충돌해서 만 멈춰버린 모습이다.

언제 고쳐질지 모르는 채로 영영 멈춰버린 것 같은 '나'라는 열차. 그렇게 내 휴식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음 전철이 언제 올 거라는 안내방송조차 없다.

문득문득 드는 의문.
'언제쯤 나는 괜찮아질까?'
'다시 달릴 수 있을까?'

틈틈이 간격을 둘 걸. 여유를 가져볼 걸. 늦게 후회도 해보지만, 때는 여유와 쉼이 사치라고 생각했다. 쁨과 성취감에도 오래 머물지 않으려 애썼다. 표를 이룬 성취감에 만족하다 보면 자만하게 되고 안주하게 되어서 나의 역에 너무 오래 정차할까 봐 두려웠다.

긴장을 놓지 않도록 마음도 몸도 지 말고 계속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철이 서울역에 도착했다. 는 빨간 광역버스로 갈아탄다.


스에 타서 오늘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해본다. 늘 자리에 앉으면 커튼부터 당겨 햇빛을 가리기 바빴던 손. 이번엔 반대로 커튼을 열어젖히고 도시의 풍경을 바라본다. 빌딩들. 사람들. 햇빛에 반짝이는 건물들.
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만지작 거리며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본다. 런 시간이 내게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매 순간 꼭 무얼 해야 하나 싶다.
지나가는 모든 시간을 잘 활용하려 애쓸 필요는 없는 거였다. 마음 가는 대로 멍하니 그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것.

쉼은, 내가 지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때 주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한 문장이 완전히 끝날 때나 찍을 수 있는 온점 같은 거였다.
사실, 내가 쉬고 싶을 때, 이렇게도, 저렇게도, 막, 찍을 수 있는 게 쉼표인데, 나는 쉼을 왜 그렇게도 아꼈을까.

끝도 없이 길어지는 만연체의 문장처럼 나는 하루를 어떻게든 늘리고 늘려 내가 해야 할 일을 그 안에 다 담으려고 끙끙댔다. 루에 한 개의 쉼표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깊은 숨을 다시 내쉰다. 그리고 들이마셔본다.

끝까지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마실 때마다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에 쉼표가 옅게 찍히는 기분.

'여행 주간엔 좋아하는 취향 따라 떠나보세요.'
빌딩 전광판에 나타나는 글자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모처럼 주어진 이 쉼의 기간에,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한번 떠나 봐'

쨍ㅡ 하고 햇빛이 창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눈이 너무 부셔서 바깥 구경은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커튼 사이로 옅게 들어오는 햇빛은 여전하다.

가을볕이 이렇게 따사롭구나. 론 커튼을 걷고 햇빛을 그대로 느끼며 창 밖 구경을 할 수도 있는 거야.

출근길, 익숙한 경로와 늘 가던 길이지만, 여태껏 해본 적 없는 몇 가지의 시도들 덕분에 오늘 출근길만큼은 여유가 내 마음 가득히 채워지는 시간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 스스로가 바로 서 있는 게 중요하고 내가 나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게 중요해.
아까 내 마음속에 떠올랐던 말을 다시 되뇌어 본다.



작년 11월 즈음 썼던 글입니다. 팟빵 팟캐스트로도 들으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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