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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ulturing me Mar 01. 2019

 김치야 미안해

대신 눈물을 흘려준 김치...

나는 김치에게 미안함이 있다.

김치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던 ‘흑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웃지 못할 ‘과오’는 부메랑이 되어 나를 괴롭히게 됐다. 아, 김치여! 짧은 시간을 머금고도 넌 숙성되어 오묘한 맛을 내거늘, 나란 인간은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너의 진가를 그리고 널 빚은 분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구나.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는 파란 눈의 미국인 선교사 가족이 있었다. 그 집엔 내 또래 남자아이들이 셋 있었는데,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의 아이들은 만화 속 공주보다도 예뻤다. 가까이서 그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정성스레 찹쌀떡을 만들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미국인 선교사 집에도 나눠주라고 하셨다. 그런데 엄마는 찹쌀떡을 예쁜 보자기에 싸놓고 나서는 이를 닦으셨다.  미국인 삼 형제를 보고 싶은 마음에 함께 가겠다고 했더니 나에게도 김치를 먹었으니 이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이유는 미국 사람들은 김치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영어도 못했으면서 미국인 삼 형제와 인사라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이를 닦았다.


 미국인 아주머니는 찹쌀떡을 받아 들자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캐러멜 향이 그윽한 파이 한 조각을 내게 주었다. 그 파이는 정말 냄새가 좋았다.  그 이후로 어린 나에게는 이런 확신이 자리 잡게 되었다: 미국 사람들은 파, 마늘, 고춧가루가 들어간 김치를 싫어한다, 그리고 향긋한 냄새의 음식만 먹는다, 그래서 예쁜 파란 눈과 윤기 있는 노란 머리를 가졌다. 이 세 가지는,  그 순간부터  불변의 법칙처럼  내 머릿속에 박혀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는 김치를 먹지 않았다.  심지어 김치를 먹으면 몸에서 냄새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김치는 나와 상관없는 음식으로 왜곡되어 버렸다. 해외 생활을 할 때에도 한국 음식 때문에 불편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외국에 있을 때는 김치가 주메뉴여야 하는 신랑 때문에 김치를 열심히 담갔지만, 나 자신은 먹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살면서 음식 솜씨 좋은 시어머니는 김치를 종류별로 담가 주셨었다.  배추김치, 열무김치, 총각김치, 깍두기, 갓김치, 섞박지 등 철마다 어울리는 김치를 냉장고 한가득 채울 정도로 담가 주셨었다. 김치를 갖고 가라거나 담그자는 시어머님의 전화를 받으면, 감사함보다는 귀찮음이 고개를 들었다. "또요?  어머님, 먹는 사람이 없어요.  조금만 주세요. 남아서 매번 버려요."  나는 김치를 큰 짐이라고 느꼈었다.  그렇게 시어머님께 김치 담그는 법과 살림살이를 눈으로, 귀로, 손으로, 시간으로 배우다 보니 어느새 종갓집 맏며느리 노릇을 어렵지 않게 해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김치 귀함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고, 심지어 김치의 맛도 잘 몰랐다. 가장 맛있게 익은 시기에 먹었어야 하는데, 남들에게 나눠주거나 매번 시어지게 만들어 주야장천 김치찌개만 끓여댔다.  그렇게 소중함을 몰랐고 김치는 언제든지 시어머니로부터 공급될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시어머님이 3년 전 돌아가셨다. 아무리 김치에 무관심했다고 하더라도 이십 년이란 세월 동안 내 눈과 입에 익은 김치는 ‘시어머니표’ 뿐이었다. 마트에서 사다 먹는 김치는 무의미한 밑반찬 같았다. 시어머님이 안 계신 빈자리를 가장 크게 그리고 자주 느끼는 장소는 우리 집 냉장고에서였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김치가 없네...",  "오늘도... 김치가 없네..." “예전엔 꽉 차있었는데... 김치가 없네..."  눈물이 났지만 마음 놓고 울면 마음을 추스를 수 없을 것 같아 매번 슬픔을 꿀꺽 삼켰었다.  심지어 냉장고를 열면 어머님이 김치를 담아주시던 빨간색 김치통이 없는 걸 확인하기 싫어 빨간색 김치통을 빈 채로 넣어 둔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시어머님께 김치를 얻어왔다고 했다. 친구도 예전의 나처럼, "뭘 이렇게 많이 주셨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슴지 않고 " 그 김치 나 좀 줘"라고 했다.  친구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정말 맛있는 시어머님의 귀한 김치를 나눠줬다.   나는 그 김치를 집에 갖고 와서 설레는 마음으로 저녁 상을 차렸다.   빨갛고 정성스럽게 담근 김치를 보자 시어머님을 보낸 후 애써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식탁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울어?"  

 "아니야,  김치가 너무 매워서 그래"   


그날 나는 매운 김치를 핑계로 울 수 있었다. 나 대신 눈물을 흘려준 고마운 김치.     

나는 이제 친구들에게 염치없이 김치를 달라고 떼를 쓴다.  어머님은 안 계시지만, 나에겐 아낌없이 김치를 퍼주는 마음 따뜻한 친구들이 있다.  


결국 나도 김치만큼 숙성돼 이렇게나마  살아온 시간의 덕을 보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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