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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ulturing me Feb 28. 2019

슬픔도 자랑이 된 나이

울어야 슬픔이,  슬픔으로 머물지 않는다.

인생의 고비.   나는 그 고비를 몇 개쯤 넘겼을까?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사람마다 고비를 넘는 타이밍은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어렸을 때 부모의 이혼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고비를 넘겼을 테고, 어떤 이는 사고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고비를 넘겼을 테고, 아니면 사업 실패로 경제적 고비를 넘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릴 적 맞벌이 부모님을 둔 덕에 친할머니와 시간을 많이 보냈었다. 그런데 열한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십 분을 늦게 오는 바람에 당신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빠가 어린 나보다도 더 어린아이처럼 오열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난 그때 슬퍼하는 아빠 곁을 벗어날 수 없어 옴짝달싹하지 않고 아빠의 눈물을 닦아드렸었다. 사랑했던 할머니를 잃은 슬픔보다 나의 전부였던 아빠가 많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먹먹해진다.


그렇듯 나의 전부였던 아빠는 너무 일찍 떠나셨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이미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었음에도 나는 너무 슬퍼서 그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어버렸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마음이 녹았는지 제대로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까 잊고 살았던 그 먹먹한 감정이 요즘 나를 자주 찾아온다.  

그 감정의 의미를 모른 채 느꼈던 그때와는 달리 먹먹해짐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게 된 지금은 가슴이 먹먹해질 때마다 숨을 쉬기 힘들어 그냥 침을 삼켜버린다.  책임을 다하며 애쓰고 사는데도 마음의 보상은 쥐꼬리만 할 때 내 마음을 알아줄 아빠가 없음이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점점 화려 해지는 세상은 오히려 우리를 감정의 가난뱅이로 만드는 것 같다. 울음을 참으라 하고 또 우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세상을 향해서 나는 ‘차라리 울자’고 외친다. 이런 일로 울고, 저런 일로 울고,  이래서 슬픔을 느끼고, 저래서 슬픔을 느끼고.... 그렇게  울어야 슬픔이 슬픔으로 머무르지 않고 힘든 순간을 버텨내는 마음의 근육이 됨을 경험했다.  오십 고개에 가까워지면서  슬픔은 가볍게 그리고 기쁨은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생의 큰 파도와 함께 슬픔은 또 올 테니까.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건 아픔을 이겨낸 순간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기쁨보다 슬픔을 자랑하고 싶다.


세상의 자랑 따위는 눈물의 깊이에 비할바가 못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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