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의미
사람들은 자기 공간을 갖고 싶어 한다. 무소유의 소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이따금 만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간을 갖는다는 것을 자기실현의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번듯하게 볕이 잘 드는 집이나 사무실을 장만하겠지만, 적은 돈으로도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사람들의 종착지 중 하나가 아마도 "반지하"라는 공간일 것이다. 영화 <기생충>으로 인해 "반지하"에 관심의 햇볕이 들고 있다. 반지하라는 공간이 없는 나라에서는 흥미와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한다. 영화를 통해서도 표현되었다시피 "공간"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생각을 좌우한다. 윈스턴 처칠도 "지금은 우리가 건물을 만들지만 그 건물이 우리를 형성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반지하"는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주거공간이라고 한다. 1970년대 초 전쟁을 대비한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건축물에 지하 대피공간을 만들라고 했다. 하지만 지하는 볕도 들지 않고 습해서 살수도 세를 줄 수도 없는 쓸모없는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법이 요구하는 규정은 준수하면서 사용 가능한 공간으로 만든 것이 반지하라는 형태였다.
사람은 쉴 곳,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공간이 필요하다. 즉, 공간은 편안함을 얻기 위한 것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공간을 통해 소유욕을 나타내기도 하고, 안정감을 얻기도 하며 그곳에서 함께 사는 이들과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사람은 어떤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많이 보내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몇 년 전 유럽에서 만난 친구가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350년 된 건물이고 우리 회사 건물은 280년 전에 지어졌어." 나는 순간 '이 친구의 old and new에 대한 개념은 나와는 매우 다르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흔히, 집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말을 한다. 시간이 누적된 공간에서 그 사람이 감춰지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공간은 그 주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같은 반지하의 공간이라도 어떤 반지하는 절망의 공간이 되었을 수 있지만 어떤 이의 반지하는 희망의 싹이 꿈틀대는 공간일 수도 있다. 공간의 물리적 한계는 인간의 의지와 감성으로 극복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반증이다.
벗어날 수 있는 여건인데도 반지하를 고집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어진 반지하라는 공간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영화를 계기로 생긴 반지하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참 고마운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머무르는 동안만은 '트렌디한 공간'이라는 긍정의 마인드로 조명하면 어떨까? 그리고 언젠간 그곳을 탈출하려는 목표로 삶에 역동성을 더해줄 수 있지 않을까? 집의 반이 지하이지만 나머지 반은 해를 보는 지상이지 않은가? 이 기회에 '반지하'에 '반지상'이라는 긍정성이 부여되면 좋겠다. 그리고 어둠이 가장 깊은 시간에서 새벽이 시작되는 것처럼 반지하의 삶은 지상으로의 찬란한 탈출의 엔진이 될 수 있다. 반지하에 관심과 흥미의 빛을 던져준 영화 '기생충'은 공간과 인간 심리의 연관성을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