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덟 번째 생일날

내가 나에게 준 자유

by culturing me

오늘은 나의 마흔여덟 번째 생일이다. 생일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일곱 살 생일 즈음에 두 살 위 오빠가 재밌게 해 주겠다며 목마를 태웠다. 중심을 놓친 오빠는 나를 떨어뜨렸고, 난 신경마비로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부모님은 "제발 살아만 있어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내 곁을 떠나지 못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의 생일날은 가족 모두의 축제이자 일 년 중 가장 기쁜 날이 되었다. 어쨌든 그해는 살아 있었으니.


그렇게 가족을 애달프개 했던 딸이 48년째 이렇게 건강히 살고 있다. 아침에 "사랑하는 딸 생일 축하해"라고 친정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이제는 기다리지 않아도 엄마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엄마가 옆방 드나들듯 내게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엄마는 늘 나에게 미안해했다. 사고 당시에도 내 옆에 없었고, 사업을 하던 엄마였기에 장기간 내 옆에서 병간호를 하지 못한 죄책감이 엄마의 마음속엔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봐도 울고, 못 봐도 울고, 해외로 보내 놓고도 울고, 데리고 와서도 울고, 모든 일을 잘 해결하던 듬직했던 엄마의 등판은 돌아서며 흐느낌에 늘 들썩였다.


아픈 나는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있었다. 기다림이 매일의 일상이었던 것 같다. 서로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는 오빠는 어린이라는 이유로 병문안이 금지돼 일 년 넘게 만날 수가 없었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부모님도 자주 볼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이제오나 저제오나 창밖만 바라보며 기다리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면 " 에잇, 오늘도 틀렸다" 그렇게 기다림에 지친 수많은 날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두 살 위인 오빠는 자기도 고작 열한 살이었으면서 내 보호자 인양 나를 수시로 낑낑대며 업고 다녔다. "오빠, 나 추워. 업어줘", " 오빠, 나 다리 아파. 업어줘" , " 오빠, 나 발 시려서 못 걸어. 업어줘"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오빠가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고, 오빠 등에 기댈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오빠와 부모님은 나의 사고가 당신들 책임이라고 생각해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나는 그걸 왜 몰랐을까?


생일날 아침, 여기저기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자니 문득 나의 생일날마다 마음속에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걸려 있었을 오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고,이내 울컥 눈물이 났다.

이렇게 중년이 되어서도 모르는 게 있다. 사고 후 40년이 지나서야 그때 아홉 살 소년의 마음이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누구나 자기감정이 가장 크듯이 나는 나의 기다림에 대한 화풀이를 부모님과 오빠에게 여러 다른 명목으로 꽤 많이 했던 것 같다.


마흔여덟 번째 생일날 나는 더 이상 막연한 화풀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나 자신에게 선물하게 되었다. 참으로 근사한 생일 선물이다. 오늘 부로 기다림에 매여있는 내 안의 일곱 살짜리 아이와는 작별을 해야겠다. "00아, 잘 가. 이젠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돼"







이전 02화결혼은 로맨틱한 사랑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