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나 역시 그런 경험을 상대에게 준 게
혼자 떠올라 미안했던 그런 날이.
아침 8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용무가 있어 일찍 전화하셨다가
내 목소리가 잠긴 걸 듣고 걱정을 시작하셨다.
평소 자식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하시는 분이라
그 열정이 때로는 몸까지 아프게 하실 때가 있다.
그런 엄마의 걱정을 보고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몸에 안 좋아요"라고 아빠는 한마디 하셨단다.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말이긴 했지만,
동시에 '너무 쓸데없이 예민하게 구는' 것 같다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나 보다.
거기에 이어
회사에 갓 입사한 현장 신입 직원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아빠가 지나가듯 꺼내시자, 엄마도 한마디 얹으셨다.
"요즘 사람들 힘들게 하면 못 버티고 나간다. 좀 잘 챙겨주든가..."
그런데 돌아오는 아빠의 한마디....
"당신은 왜 사서 신경을 그렇게 써요.
그러니까 몸이 안좋지. 내가 알아서 다 하니까,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좀 신경을 편히 하세요."
사실 이 말은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라는 속담에서 나온 표현이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의...
아빠는 아마, "괜히 신경 안 써도 되는 일까지 속 끓이고 신경 쓰지 마세요"라는 의미로
편하게 하신 말이었을 거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 말이 다르게 와닿았다.
먼저 아빠가 이야기를 꺼내놓고는
엄마가 한마디 하니까
갑자기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의 말을 하는 거라고 느끼신듯 하다.
그동안 사업에는 참견하지 않고 뒷바라지만 해온 자신이
마치 "남"처럼 취급받는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내가 그동안 뭘 했는데 감 놔라 배 놔라야? 사업 초기에 누가 고생했는데?"
자신은 "남"이 아닌데 "남의 일"처럼 취급받았다는 서운함,
간섭한 게 아니라 상대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도
간섭했다는 오해를 받았다는 억울함이 폭발한 거였다.
30분 내내 격양된 목소리로
서운함을 쏟아내시는 걸 들으며, 저는 참 난감했다.
아빠의 마음도 이해가 갔고, 엄마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듣고 있으니 괜히 미안해졌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엄마와의 통화에서 제가 먼저 어떤 이야기를 꺼내놓고는,
엄마가 뭔가 덧붙이려고 하면
"엄마,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말을 끊어버린 순간들....
엄마 입장에서는 '기껏 키워놨더니, 지가 아쉬울 땐 혼자 계속 떠들고...
머리 컸다고 잔소리도 안 하지만,
한마디 얹으려고 하면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아무 말 마라고...오늘과 같은 똑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솔직히 저 같으면 정말 화났을 텐데,
엄마들은 그래도 참고 사랑해 주시니까...
그럴 거면 왜 말을 꺼낸 건지, 정말 억울하고 화나고 괘씸했을 거 같다
나도 엄마에게 같은 상처를 주고 있었구나 싶었다.
전화를 마치고 생각해 봤다.
가족이라서 더 어려운 것 같다.
소중한 사람, 가장 보듬어야 할 사람에게
오히려 가장 무심한 말을 하게 된다.
나쁜 의도가 전혀 없다 해도,
그저 무심코 한 말들이 때로는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나도 모르게 비슷한 말들을 쓸 때가 있다는 것.
그중에서도 엄마에게 가장 많이 그런 것 같다.
"그럴 필요 없어요", "신경 쓰지 마요", "내 문제예요" 같은 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안 하면서도 엄마에게는 자주 한다.
사실 제일 내가 아픈 이야기도 많이 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이런 무심한 말들도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가까운 사이니까 오해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 더 그런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심하면서도,
정작 가족에게는
'설마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겠어?' 하고 방심하게 되는 건가???.
참 아이러니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친절한 말을 하게 되다니.
무심코 한 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가족이기에 더 내 위주로 말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심하게 배려해야 할 사람에게 무심한 말을 하고,
따뜻하게 대해야 할 사람에게 차갑게 들릴 수 있는 말을 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고,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무심코의 말들이
때로는 의도된 상처보다 더 깊게 남는 것 같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가까운 사람에게 오히려 더 무심하게 말한 적은 없나요?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 내 마음을 던져버린 적은 없는지요?
'설마 오해하겠어?'라고 생각하며 신경 쓰지 않고 말한 순간들은 없나요?
혹은 그 반대로,
가까운 사람의 무심한 한마디에
예상치 못하게 마음이 상했던 경험은 없으세요?
힘든 일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털어놨는데
"그런 거 가지고 왜 그래?"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요.
아마도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서툰 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가까워서 더 아프고, 사랑해서 더 서툰 그런 말들을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