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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Mar 24. 2020

“개 키우면 애 안 생겨”

아이와 강아지가 사는 집

봄 햇살이 좋아 우리 집 노견 김구찌와 개나리꽃이 활짝 핀 동네 어귀를 산책했다. 언젠가부터 산책을 나서면 늘 앞장서서 가던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보폭을 천천히 맞춰 걸어야 할 만큼 구찌는 노견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었다.


3년 전, 마흔을 한 달 앞두고 16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치겠다는 선택을 한 후, 회사에 퇴직 의사를 밝혔을 때, 회사는 고맙게도 휴직을 주었고, 짧은 휴직 후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엄마가 되었다. 아들은 노산 엄마에게 고맙게도 건강하게 와주었고, 잔병치레 없이 무탈하게 자라 지금은 자동차와 돌고래를 좋아하고 놀이 학교 영어 선생님이 제일 좋다는 의사 표현을 할 만큼 자랐다.

김구찌와 이준이

신혼 초반의 나는 지금의 주 52시간 근무는 상상도 못 했던 am:8 to pm:8이 일상이던 경직된 조직문화의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해외 출장이 빈번한 직업이었다. 그 무렵 남편은 서른 넘어 뒤늦게 시작한 고시에 합격해, 개업 직후의 고단함이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사십 줄에 들어선 우리 부부가 자수성가라는 단어를 쓸 만큼 부자가 되진 못했지만, 당시의 우린 더디지만 차츰 자리를 잡아갔기에 아이를 계획하는 일은 조금 미뤄졌다.


그런 우리 부부에게 반려동물 구찌는 퇴근 후, 현관에서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반갑게 반겨주어 회사의 고충을 단번에 잊게 해 주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반복되는 야근과 저녁 미팅에 구찌가 온종일 홀로 답답하게 지낼 걱정에 출근 전, 단 십여 분 남짓 한 시간이라도 산책을 매일 시켜주었고, 주말이면 같이 여행을 떠나 바람을 쐬며 행복한 순간을 함께했다. 지금보다 반려동물 문화가 확산되기 전이라 강아지와 함께 묵을 수 있는 숙소를 찾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숙제였지만, 제부도 횟집에 딸린 5만 원짜리 방에서 언제 빨았는지 알 수 없을 이불 위에서 자더라도 강아지와의 숙박을 허락함에 감사했고, 우리는 구찌와 부산 달맞이 길에서 벚꽃놀이를, 여름이면 강원도 양양 죽도해변을 거닐었고, 가을엔 전주의 한옥마을을 산책하며 추억을 쌓았다. 구찌와 함께 여행하며 우리 부부는 각자의 일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말끔히 비워내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소심했던 성격도 점차 무뎌지고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서 제법 자유로워졌다 여길 만큼 느긋해졌고, 여느 부부처럼 사소한 일에 부부 싸움을 벌여도 남편과 나 둘 다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성격이라 배알도 없이 금세 웃고 지내다 보니 꽤나 사이가 좋아 정서적으로 흔들림 없이 균형을 맞추며 산다 생각했는데, 이런 내게도 이 한 마디를 듣고 나면 온종일 기분이 다운되고 결국엔 펑펑 울곤 했던 말이 있었다.


“개 키우면 애 안 생겨”


나의 지난 직장 생활은 좋아하는 일을 했기에 업무적으론 재미있고 성취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회사의 고충은 일이 아닌 인간관계에서 오듯 나 역시 그랬다. 어느 회사를 가나 본인은 멍게 피부의 소유자임에도 회사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스치는 찰나에도 붉게 솟은 타인의 뾰루지를 포착해 걱정스레 쳐다보며 ‘무슨 일 있냐? 안색이 왜 이리도 안 좋냐?’ 하며 호들갑을 떠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회사 업무보단 타인의 개인사를 논하며 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런 이들에게 결혼 후, 오랜 시간 아이가 없이 반려동물과 산다는 이유로 걱정이랍시고 툭 던지는  말은 설사 진심 어린 우려였더라도 기분이 상했다. 그 어떤 근거도 없이 개를 키우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에 때로는 ‘아이가 없으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했다.
 
 ‘남의 부부생활에 신경 끄고 네 인생을 사세요.’


 머릿속에선 수도 없이 내뱉었지만, 정작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삼킨 말이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이 지나가기 만을 바랬던 것 같다. 문제는 가깝지도 않은 동료부터 거래처와 상사까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경이무례(輕而無禮)’하게도 이 말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다.


평생을 반려견과 살아오신 시어머님을 만난 덕에 명절에도 받지 않는 스트레스를 회사에서 아이가 없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기혼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런 선을 넘는 말들을 조언이라 여기며 반복적으로 듣는 건 곤욕이었다. 다행히도 요즘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가 주로 오가는 저녁 회식도 근절되었고 회사의 주역인 밀레니얼 세대들은 이런 업무 외적인 부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이들을 ‘라떼 꼰대’라 부르며, 꼰대들이 격 없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단칼에 거리를 둔다고 하니 세대가 바뀔수록 사회는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서른이 되던 해, 회사의 최연소 과장 타이틀로 주변의 시샘과 원성을 샀던 나는 타 업종으로의 이직을 거치며 과장만 10년을 내리 한 만년 과장이었다. 샐러리맨의 커리어로는 영 빵 점 짜리 처세지만, 업종 전환을 거치며 경험과 저변이 넓어졌고 다양한 분야의 좋은 선, 후배들을 얻어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에 때때로 도움이 되곤 한다. 그러고 보니 ‘남들처럼’, ‘남들 하듯이’ 승진도, 출산도 ‘제때에 맞추어’ 살아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아이가 없던 시절에도, 아이가 있는 지금도 구찌와 함께하는 순간은 늘 행복했다. 분명, 아이와 강아지를 함께 키우는 엄마는 조금 더 부지런해야 하고, 여행과 이동시 많은 제약이 있지만,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도 반려견이 주는 행복감은 비할 바가 아니다.


노산 엄마라는 트렌디한 타이틀을 부여해 준 아들은 요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놀이 학교에서 배운 알파벳 송을 흥얼거리며 한쪽 눈이 잘 안 보여 간식을 코앞에 갖다 줘야 먹는 노견의 아침밥을 챙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태어나고부터 반려견과 함께 자라 온 동네 개와 고양이를 참견하고 다니고, 동네 동물병원 원장님을 친 이모처럼 따른다. “개 키우면 애 안 생겨”라는 말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을 만큼 우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언젠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노견의 가족이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우울증 유발자'의 행복한 삶을 지향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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