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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Apr 13. 2020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고향 4월의 벚꽃 아파트

주말에 다녀온 친정집 길 건너엔 내가 30년 가까이 살았던 고향과 다름없는 오래된 아파트로 재건축을 위해 공사 현수막이 아파트 단지를 에워싸고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아파트는 을씨년스러웠지만, 본디 매 년 이맘때면 벚꽃 아파트로 유명한 곳이었다. 아파트 분양과 함께 이주하여 이사 역시 아파트 단지 내에서만 했었고 국민학교에 입학하며 엄마가 사주었던 형광등이 달린 피노키오 책상과 침대가 방에 자로 잰 듯 딱 들어맞는 작은방이었지만, 가장 높은 층에 살아 침대 머리맡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밤하늘이 보여 나는 그 방을 무척 좋아했다. 토요일 오후면 침대에 누워 소년중앙이나 멋진 언니들의 사진이 가득한 하이틴 매거진을 읽는 것이 낙이었는데, 아주 가끔 그 창을 통해 마주치는 눈빛이 있었다. 1114호에 살았던 A였다. A는 늘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에 큰 키와 등치로 또래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옆집 아이였다. A는 자폐아였다.


부러질 듯 가녀린 체구에 빠른 걸음으로 크로스백을 메고 바삐 걸어 다니시는 A의 엄마인 1114호 아줌마는 이 아파트 단지에서만 벌써 다섯 번째 이사를 하셨는데 비로소 아파트의 가장 위층, 맨 끝 집으로 오기 위해 부단히 도 애를 쓰셨다고 한다. 지금이야 전망에 대한 가치와 층간 소음으로 가장 고층의 아파트에 프리미엄이 붙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30여 년 전엔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춥다는 이유로 선호하는 층수는 아니었다. 1114호 집 이사의 이유는 A 때문이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A는 종종 심야 시간에 괴성을 질렀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시 우리가 살았던 복도식 아파트는 CCTV 하나 없이 대부분 대문을 열고 지냈다. A는 가끔 집을 빠져나와 문 열린 다른 집에 불쑥 들어가기 일쑤였고, 나이에 비해 큰 키와 등치 그리고 특유의 표정에 이웃들의 민원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런 1114호가 우리 옆집에 이사 오면서 내가 고등학교 입학 무렵 우리 집이 앞 동으로 이사를 갈 때까지 10년이 넘게 나란히 살았다. 아버지는 1114호가 이사 오던 날, A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저녁 식사를 하며 나와 오빠에게 A가 설사 우리 집에 들어오거나 소리를 질러도 놀라지 말고, 엘리베이터나 동네에서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건네라고 하셨다. 기억에 남는 건 아버지가 A와 1114호 가족들에 대해 장애가 있어 불쌍하다거나 걱정스러운 표현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그저 501호 C가 줄넘기를 잘하더라 거나 303호 D는 요즘도 자주 놀러 오냐는 이야기처럼 덤덤히 말씀하셨고, 나는 그런 아버지의 말씀에 유난스럽지 않게 다른 이웃의 아이들과 지내듯 A와도 인사를 하며 여느 아이들처럼 지냈다. 우린 A가 불쑥 집에 들어와도 그러려니 했고, A는 신발장에서 오빠의 운동화를 만지작대며 앉아있으면 엄마가 보따리 방문 판매 할머니에게 산 미제 체리 가루로 만든 주스를 내어주곤 했다. 1114호 아줌마는 그런 우리 집을 무척 고마워하셨고, 부산 사투리의 무뚝뚝하신 1114호 아저씨는 퇴근길에 한국에 처음 생긴 체인 피자집의 피자를 종종 사다 주시곤 하셨다.


A와 잘 지내는 것이 특별히 착한 아이라서 행하는 행위가 아닌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기게 한 아버지의 가르침이 지금 와서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나에게 A를 장애인이라 불쌍한 아이라 이야기하셨다면, 혹은 조심하라 당부했다면 나는 은연중에 A와 같은 이들이 함께하기 불편한 이들이라는 편견이 심어졌을 것이다. 타고난 목소리도 큰 내가 매사에 유난을 떨고 편견이 가득한 이로 성장했다면, 난 어쩌면 여론을 주도하는 못된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흔한 표현이지만 정말이지 나에게 아버지는 항해사들의 북두칠성과 같은 존재였다.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으니 말이다.


혐오가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게 인간의 본성 일 수도 있다지만, 선거철이 다가오니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을 향해 혐오하고 선거에 나선 후보들의 개인사가 낱낱이 까발려진다는 표현이 가장 적당하지 싶게 기사가 나오면 몰려와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런 개인사엔 가족의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공직에 있기 위한 필수 덕목이 당사자와 자녀의 군대 문제일 것이다. 요즘엔 이 문제에 앞서 국적이 더 많이 거론되긴 하지만, 여전히 자녀의 군 입대 여부는 모든 선거의 주요 쟁점 사항이다.


1114호 아저씨를 다시 보게 된 건 10여 년 전 뉴스를 통해서였다.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문제에 공직에 계셨던 옆집 아저씨는 이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셨다. 아저씨와 관련된 기사의 댓글은 온통 욕설이 가득했다. 워낙 민감했던 사항이었기에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그저 옆집에 살던 이웃집 아이였던 내가 굉장히 분노하고 마음 아팠던 건 다름 아닌 A에 관한 이야기였다. 큰 아들인 A가 왜 군 면제를 받았느냐는 내용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그들의 글들에 대신 답글을 달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그런데도 아저씨는 끝까지 내 아들은 장애가 있어 면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그저 묵묵히 사태를 마무리하시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그때는 아저씨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저 왜 저들의 험한 비난을 받는 것인지 안타깝고 답답했다. 이제 와 아이를 키우며 돌이켜 보니 아저씨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아저씨는 사태의 심각성만큼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들을 내세우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우리가 살던 벚꽃 아파트는 재건축에 들어가고 매년 이맘때면 중간고사 기간에 벚꽃이 이리도 예쁠 일이냐며 푸념을 하던 아이는 중년의 애 엄마가 되었다. 몇 년 전 마트에서 마주친 A의 동생 B에게 들은 소식은 A는 1114호 아줌마의 헌신으로 직업 재활교육을 이수해 지금 국가와 기업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비영리 단체의 바리스타로 일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1114호 아줌마의 영향으로 유치원 시절부터 신부님이 꿈이었던 B는 형과 같은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의사가 되었다. 그 시절 아름다운 벚꽃이 가득했던 아파트를 이제는 다시 가 볼 수 없지만, 살면서 한 번씩 추억을 들추며 기억 속에 소중히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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