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제주 ‘언택트 여행’
점점 세차게 떨어지는 빗줄기를 뚫고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코로나 이후 6개월 만의 비행이라 아이도 우리도 설레는 마음을 안고 기내에 탑승해 내려다본 제주의 하늘은 회색빛 구름이 뒤덮어 여행 내내 맑은 날씨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이번 여행은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주는 멋진 여행 사진 한 장 없더라도 답답했던 코로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제주 말로 ‘놀멍 쉬멍’을 실행하러 떠나왔기에 날씨는 문제 되지 않았다.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맞이해 준 7월의 제주는 아이와 느릿느릿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렌터카 회사에 도착해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한쪽에서 오메기 떡과 한라봉 주스를 판매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애교를 부리며 시식용 떡을 얻어먹고 있었다. 종종 미운 네 살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득하게 해주곤 하지만, 그동안 아이와 자주 여행을 함께 한 보람이 무어냐 묻는다면 낯선 곳에서도 잘 먹고, 잘 자는 것과 낯을 가리지 않는 친화적인 성격으로 자란 점 그리고 반복된 경험을 통해 식당과 카페에서 착석하고 조용히 하기 등의 최소한의 규칙을 비교적 잘 지킨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또래의 아이답게 목소리 톤 조절이 안 된다거나 때때로 떼를 부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여행 동반자로서 아이는 충분히 제 몫을 해 내고 있다.
렌터카에서 차량을 배정받아 우리 가족이 향한 곳은 한적한 제주의 서쪽 ‘한경면 금등리’로 처음 가보는 곳이다. 그간의 제주 여행은 늘 '중문'으로 향하거나 '섭지 코지'와 유명 목장 등의 인기 관광지로 행선지를 정하곤 했는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떠난 작금의 제주 여행은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언택트(Untact) 여행'을 지향하기에 우리 가족만의 프라이빗한 장소에서 머물며 안전하게 지내다 오는 것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에서, 혹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와 같은 공간에서도 이제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낯선 이에게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믿을 수 있는 가까운 이들과 한정적으로 접촉하는 일상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이번 제주 여행 숙소를 정함에 있어도 같은 맥락이었다. 제일 먼저 검색 한 단어는 ‘제주 독채 펜션’이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 한 끝에 찾은 숙소는 한적한 제주의 시골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주변에는 우리 숙소 외엔 넓은 농지와 낮은 언덕만이 있는 곳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작은 수영장이 있고, 차로 15분 거리에 작은 시가지와 마트가 있어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우리 가족끼리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호젓한 숙소를 찾아 도착한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코로나가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 여행 패턴마저 변하게 했다는 점이 못내 씁쓸했다.
숙소에 입실까지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우리는 멀지 않은 ‘조수리’ 마을에서 간단히 식사와 커피를 마시기로 하고 낮은 돌담장과 지붕이 눈이 띄는, 간판에 분식집이라 쓰인 가게에 들어섰다. 식사 시간이 지나 조용한 가게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했다. 예전이라면 매 끼를 제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 헤매었을 우리지만, 코로나 이후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을 배제하다 보니 일정이 느긋해졌다. 어딘가를 꼭 찾아가야 한다는 것 또한 여행의 즐거움도 되지만, 한편으론 의무감도 되었기에 이번 여행의 테마인 ‘놀멍 쉬멍’ 답게 그런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게으르게 다녔다
그렇게 우연히 찾은 낮은 제주식 가옥의 분식집 떡볶이와 튀김은 정말 맛있었다. 아이는 분식집 작은 마당에서 까만 돌들을 만져보며 신기한지 연신 싱글벙글하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대각선에 보이는 카페로 향했다. 나무 창살로 된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니 민트 색 타일이 눈에 띄는 예쁜 카페였다. 구수한 향을 풍기는 커피를 한 잔씩 받아 들고 홀짝이며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선한 인상의 숙소 주인 내외가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간단히 안내해 준 후 집 열쇠를 쥐어주고 주인 내외는 곧 떠났다. 독채 펜션이면서 키즈 펜션이기도 한 숙소는 깨끗하고 층고가 높아 기분이 좋았다. 또 곳곳에 아이가 좋아할 공간과 장난감이 가득했다.
우리는 사전에 숙소에 문의하고 허락을 받아 저녁 식사 시간에 먼저 제주에서 여행 중인 친한 친구 가족을 초대했다. 아이 아빠는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장을 보러 떠나보내고 나는 방에서 짐을 풀고 있는데 아이는 연신 ‘엄마! 꼭꼭 숨어라’를 외치며 숙소 곳곳에 숨고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었다. 제주의 날씨는 여자 마음과 같다더니 구름 낀 회색 하늘도 구름이 흘러가며 아주 잠시 파란 하늘을 보여주었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내리고 창 밖을 바라보니 제주에서는 벽에 그림을 걸어둘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도 자주 보는 사이지만, 제주에서 만나니 더 반가운지 아이들은 수영장과 모래놀이터를 오가며 신나게 놀고 아빠들은 저녁 준비를 하였다. 아이가 없던 시절 술잔을 주고받으며 오가던 낭만적인 대화는 부동산과 교육 이야기로 바뀐 지 오래지만, 풀벌레 소리와 장마철답게 촉촉한 제주의 공기를 느끼며 나눈 마트 산 회와 삼겹살이 찐하게 맛있었다. 지인을 배웅하고 설거지를 마친 후, 돌아보니 아이는 식탁 주변에서 놀다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안아 일으켜도 깨지 않아 잠옷도 못 갈아 입히고 그대로 재웠다. 그래. 여행 와서 무슨 잠옷씩이나. 신나게 놀았다는 걸 증명하듯 깊이 잠든 아이를 보니 여행 와서도 아이가 어지른 것들을 쫓아다니며 닦고 치우기 바빴던 제주 여행의 첫날밤이 뿌듯했다. 잠든 아이 귀에 ‘내일도 신나게 놀아라 아들 사랑해.’ 작게 속삭이고 거실 소파와 한 몸이 된 육아 동지 남편을 찾아 제주산 맥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새벽녘까지 잔소리를 섞어가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낄낄대며 나누다 잠들었다.
아침 공기 마시며 꽃사슴과 산책
아침 일찍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세계 자동차 & 피아노 박물관’을 찾았다. 오픈 시간에 도착한 이곳은 그간 제주를 여행하며 다녀본 테마 박물관들에 실망했던 이들에게 꼭 한번 권하고 싶은 곳이었다. 넓은 부지에 한적하게 자리 잡은 박물관을 들어서니 예쁜 꽃사슴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일본 오사카에 여행을 가면 하루 시간을 내어 기차를 타고 ‘나라(奈良)’를 방문하는 이유가 ‘사슴 공원’ 때문이었는데 그 순하고 예쁜 꽃사슴들이 조용히 다가오는 경험을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제주 자동차 박물관’이었다. 아이는 사슴을 가까이에서 처음 보는 것도 신기하고 손에 쥐어 준 당근 덕에 사슴이 따라오니 이 상황이 너무 행복한 듯 보였다. 이른 아침에 박물관을 찾아 나지막이 깔리는 피아노 선율과 새소리를 들으며 사슴들과 잠시 함께 시간을 보내니 '미야자키 하야오 (みやざきはやお)'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 (もののけ姫)'속 한 장면을 거니는 기분이 들어 아이는 물론 나에게도 좋은 곳이었다.
한 참을 사슴과 시간을 보내고 박물관에 입장하니 입이 딱 벌어졌다. 시대별, 브랜드 별로 전시된 자동차들과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이 조각한 피아노까지 전시 품목과 수집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자동차 기업이나 지자체 소속이 아닌 대구에서 섬유 사업을 운영하던 개인(김영락 관장)이 은퇴 후, 사비를 들여 지은 곳이었기에 더 놀라웠다. 요즘 SNS의 유행인 ‘플렉스(flex)’의 끝이 바로 여기 있었다. 아이는 박물관에 구비된 미니카를 타고 전시물을 흥미롭게 관람한 후, 박물관의 마지막 코스인 전동 자동차 타기를 마지막으로 체험하고 기분 좋게 다음 행선지로 나섰다. 전시 품목의 뛰어난 구색력과 잘 꾸며진 자연환경으로 아이가 있는 가족뿐만 아니라 연인들이 방문해도 좋을 여행지였다.
구름이 가려준 '협재 해변'
제주에서 만난 지인 가족과 다시 만난 곳은 '협재 해변'이었다. 우리 가족이 제주에 오면 어김없이 찾는 곳이다. 맑고 푸른 바다와 아이들이 놀기 좋은 해변이 아름답게 펼쳐진 이곳에 이번 여행처럼 오래 머물다 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유는 바로 ‘제주의 장마철’ 흐린 날씨 덕분이었다. 맑고 파란 하늘의 협재는 풍광 사진이 기가 막히게 찍히는 명소지만, 뜨거운 여름 햇살에 이내 그늘을 찾아 금세 나오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구름 낀 흐린 날씨는 7월의 따가운 햇살도 가려주어 아이들이 오래도록 모래성도 쌓고 까만 제주의 돌 틈에서 아빠와 게도 잡으며 한 나절을 실컷 놀아도 도무지 해변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을 만큼 실컷 놀 수 있었다.
식사 시간을 피해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주 음식 전문점을 찾았다. 이곳은 제주이기에 가능한 정원을 갖춘 식당으로 일제강점기 1926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꽃과 나무들로 채워진 넓은 정원에 방목된 닭과 커다란 강아지도 있고, 역대 대통령들도 다녀간 유서 깊은 식당이었는데 돔베 고기, 전복 솥밥, 통 갈치구이와 귤 김치 등 제주도에 오면 한 번쯤은 먹고 가는 메뉴들로 식사를 하였다. 음식들은 깔끔했고 식당에 들어오기 전 이미 이색적인 정원 분위기에 취해 여행지에 온 기분을 만끽하며 식사를 마쳤다.
식당에서 오분 남짓한 거리에 카페를 찾았다. 서울에도 지점이 있는 곳이지만, 제주만의 분위기로 꾸며진 카페는 이국적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아이와 제주 여행을 하다 보면 노 키즈 존인 카페를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데 이곳은 야외에도 넓은 공간이 있어 아이에게 끝없이 주의를 주거나 스마트폰을 안겨주지 않아도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여행지는 모두가 귀한 시간과 돈을 들여 여행을 온 만큼 아이들에게 매너를 지키게 하는 건 당연한 일이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려움을 겪고 또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다행히도 이곳에선 야외 테이블 바닥의 개미와 달팽이를 구경하는데 푹 빠진 아이 덕에 차분히 커피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언택트 여행'이라며 떠나왔지만, 제주에서의 마지막 숙소는 호텔로 정했다. ‘호캉스’라는 단어가 상용화된 것처럼 호텔이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쾌적함과 편안함이 있다. 우리 가족도 여행의 마지막 밤은 빳빳이 다려진 새하얀 호텔 침대에서 늦잠을 잔 후,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서울로 출발하기로 했다. 시즌을 맞은 호텔은 예상보단 북적이지 않았고 야간에는 수영장에서 흥겨운 공연이 한창이었다. 주로 가족 단위의 고객이 많아서인지 엄마 아빠들의 젊은 시절인 90년 대 후반의 팝송들이 연이어 나와 흥겨움에 몸은 따라주지 못했지만, 물속에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호텔에서 지내는 동안 수영장을 제외한 호텔 내 이동과 레스토랑에서 모두가 체온을 재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모습이 익숙할 정도로 코로나는 여행지의 풍경도 바꿔 놓았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다가왔지만, 올 초부터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는 지금껏 확진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며 질병에 대한 불안 심리가 만성화된 지 오래고, 뉴스에선 연일 경기 침체와 부동산 정부 시책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니 심리적으로 편치 못한 요즘이었다. 주말을 이용해 잠시 뉴스는 꺼 두고 아이와 함께 흐린 날씨 속에 찾았던 촉촉한 제주에서 사진 명소를 다니거나 부지런히 맛집을 찾진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 올 한 해의 절반을 아프지 않고 무사히 잘 보냈다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는 시간이었다. 벚꽃 시즌엔 꼭 '벚꽃 엔딩'을 듣는 촌스러운 우리 부부는 제주로 떠날 때면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제주도의 푸른 밤’을 들었다. 인기 가수들을 통해 수 차례 새롭게 음원이 나올 만큼 사랑받는 곡이지만, 우리는 도입부에 파도소리가 잔잔히 깔리는 가수 ‘최성원(1988 동아기획)’이 부른 원곡을 가장 좋아한다. 30년도 넘은 감성적인 이 곡이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왠지 응원가로 들린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린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린 싫어요
‘제주도의 푸른 밤’ 가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