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작년 이맘때 <운다고 달리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었습니다. 벌써 1년이나 된 줄은 몰랐는데 여전히 책상 가장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놓여있어요. 떠오르는 느낌은 있지만 표현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을 때 열어보곤 했습니다. 마치 몇 해 전 적어둔 일기장처럼 말이죠. 이번 박준 시인의 신간이 나왔다는 걸 뒤늦게 알게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나갔습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내 공간에 걸어 둘 그림을 사러 왔다'고 가정하는 것이에요. 수 많은 작품들 중 한 작품만 찾으면 됩니다. 넓은 미술관을 한바퀴 돌아 결국 그 한 점의 그림 앞에 다시 섭니다. 왜 이 그림일까, 하고 오래 생각에 잠겨보세요. 생각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그 그림은 내 것이 되어버립니다.
저는 시집을 읽을 때 비슷한 기분을 느낍니다. 정성스레 시 하나를 골라 옮겨 적습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전해 줄 편지라도 되는 것 처럼 말이죠.
곁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진 자리에서 곧 사라졌고 나는 너머를 생각했으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헤매고 낯익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시간과 공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잔상들을 웃자라게 했으므로 근처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 우리들의 천국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함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격랑을 보던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비가 쏟고 걸음이 질척이다 멎고 마른 것들이 다시 젖을 때의 일입니다 ... 잠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눈을 감고 있는 일로 당신으로부터 조금 이르게 멀어져보기도 했던,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기억도 없는 그해 여름의 일입니다 여름의 일 - 묵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