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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위스키를 배우려면 스코틀랜드를 가야겠지?

출국 전날 넘어졌지만, 스코틀랜드는 이미 예약됐다

by 제이림

영국 본사 임원의 현장 합격 통보로, 내게 새로운 직업이 생겼다. 일주일 뒤, 아시아태평양 지사가 있는 상하이에 하루 들렀다가 곧바로 스코틀랜드로 출장을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그 영국 임원은 상하이에서 근무 중이었다.


인생이 뜻대로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하나 터졌다. 그 무렵 나는 인라인스케이트에 푹 빠져 있었고, 하필이면 출국 전날, 일산에서 인라인 마라톤 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상위권에 랭크된 상태였고, 초청선수로 출전이 잡혀 있어서 빠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출국을 하루 앞둔 상황이라 대회를 포기하려 했지만, 21km 하프 마라톤이어서 큰 부담은 없겠다 싶었다.

아직은 넘어지기 전이라 기분이 좋아 보이나...

결국 출전했는데, 선두 그룹으로 치고 나가던 중 아스팔트 위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다. 문제는 내 뒤를 따르던 30여 명이 함께 엎어지며 단체 사고가 났다는 것.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나 역시 어깨와 손바닥, 무릎에 찰과상만 입었다. 출국 자체는 문제없었지만, 출장 내내 소독약과 거즈를 들고 다니며 상처를 갈아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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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손바닥, 그리고 무릎엔 습윤 드레싱 거즈를 덕지덕지 붙이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땐 아직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는데, 그 꼴을 하고도 흡연실에 들어갔다. 정말, 내가 봐도 가관이었다. 붕대를 감은 채 상하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앞으로의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눈을 감았다. 상하이는 예전 패스트푸드 회사에 다닐 때 몇 번 가본 곳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문제는 어제 다친 상처들. 진물이 거즈 밖으로 흘러나와 셔츠에 달라붙고, 여러모로 번거롭고 정신 사나운 여정이었다.


그나마 상하이에 하루라도 머무르게 되어, 상처를 조금 수습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회사에서 보낸 기사가 푸동공항 입국장에서 푯말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장면이 얼마나 쑥스러웠는지 모른다.

"Ambassador, Mr.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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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입국하던 한국인들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붕대를 칭칭 감은 사람이 절뚝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데, 중국인 드라이버는 그런 나를 위해 ‘Ambassador’라고 쓴 푯말을 들고 있으니 말이다.


차를 타고 40분쯤을 갔을까? 호텔로 바로 체크인하라는 연락을 중간에 받고, 호텔에서 잠깐 상처의 붕대들과 거즈를 갈고 사무실로 갔다. 지금은 내가 묶었던 호텔보다 좋은 곳도 많이 상하이에 생겼겠지만, 그때는 내가 갔던 곳이 꽤 고급이었던 거 같다. 기사부터 호텔까지, 회사가 직원 복지를 잘 챙긴다는 게 느껴졌고, 괜히 기분이 우쭐해졌다. 아스팔트에 갈아버린 상처 따위는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대사급으로 대우받는 느낌. 이건 스위트룸 아닌가요??
위스키회사답게 사무실에 바가 세팅되어 있다. (전 동료의 초상권 때문에 모자이크)


슈트까지는 필요 없고, 비즈니스 캐주얼만 입고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이 있었다. 사무실은 호텔에서 걸어서 1분 거리. 호텔에 잠깐 들러 상처 붕대와 거즈를 갈고 사무실로 향했다. 거기서 다시 한번, 우리 위스키 라인업과 각 제품의 특징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대낮부터 위스키 테이스팅만 서른 종류 넘게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상하이와 베이징 시장은 영국 임원이 직접 내가 맡을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먼저 나를 운용해 보고, 이후에 상하이와 홍콩에 같은 포지션을 추가로 채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는 상하이의 최고급 바와 호텔 10여 곳을 돌며, 우리 제품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진열 공간을 얻게 되었는지 설명을 들었다.

그의 상하이 시장 개척 무용담을 듣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상처를 다시 소독하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나의 진짜 목적지는 [Aberdeen, Scotland].
상하이에서 13시간을 날아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다. 2시간 정도 환승 대기 후, 국내선을 타고 밤 10시쯤 애버딘(Aberdeen)에 도착했다. 그 당시 나는 회사 생활을 오래 하진 않았던 때라, 10시간 넘게 비행하는 출장도, 비즈니스석도 모두 처음이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이미 '어느 나라의 대사님'이 된 듯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서른셋의 나는 신이 나서 비즈니스석 사진을 여기저기 찍어댔다.

게다가 내가 탄 항공사는, 그때 처음 타 본 ‘Virgin Atlantic’이었다.

Virgin 항공 - 처음 타봄
비행기에 바도 있어요 (25년 전...)

그렇게, 나는 생애 첫 '위스키 교육 출장'의 진짜 시작점,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진짜 위스키의 세계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Aberdeen 공항에서 숙소로.. 22:05
아직 5월인데, 벌써 백야가 시작되나요?
파란점들이 모두 위스키증류소들입니다. 빨간 화살표가 애버딘(Aberdeen)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곳은 크레이겔라키(Craigellachie). 이곳은 글렌피딕, 맥캘란, 조니워커, 시바스 리갈, 밸런타인 등 우리가 잘 아는 위스키 브랜드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대량 생산을 하는 공장지대라기보다는, 유명 브랜드들의 몰트 원액을 생산하는 ‘핵심지대’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일단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부터는 증류소로 직접 가서 위스키의 생산 과정과 병입 과정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배우게 될 예정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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