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사라진 도시에서, 나도 조금 증발했다.
아침이 밝았다. 아니, 밝았나? 새벽 두 시까지도 창밖은 희끄무레했고, 완전히 어두운 적이 있었나 싶다. 스코틀랜드의 여름 백야. 해가 진 듯 마는 밤공기 속에서, 잠든 것도, 깬 것도 아닌 채 아침을 맞았다. 온몸은 쑤시고, 깊은 잠은커녕 뒤척이다 일어난 아침. 몸을 추스르며 숙소 창문을 열었다. 클래캘러키에서 그나마 괜찮다고 들은 이곳, 외관은 고성의 일부 같기도 하고, 정원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브레이브 하트'의 멜 깁슨이 큰 칼을 들고 정원을 가로지를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창문을 열고 바깥공기를 맞이하니,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툭 친다. 분명 아침인데, 공기엔 아직도 어젯밤의 습기와 스모키 한 향이 남아 있다. 그 특유의 냄새. 피트를 태우는 향, 마치 바닷가에서 오래된 나무를 불태우는 듯한 퀴퀴한 스멜. 증류소가 많은 지역이라 그럴 거라며, 프런트 직원 웃으며 말했던 게 떠올랐다. 멀리 언덕 위로 햇살이 조금씩 번지고, 그 아래로 자리한 증류소 건물들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드디어 첫 증류소 견학이 있는 날. 숙소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곳이지만, 그 길마저도 여행의 일부였다.
방도 무척이나 좁고, 침대도 작고, 화장실도 작고... 아무튼 그리 편한 숙소는 아니었으나, 아늑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아침식사도, 직원들도, 분위기도 내가 정확하게 스코틀랜드에 왔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데리러 온다고 프런트에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일단 증류소 직원들과 상견례를 하고 전반적인 몰트위스키 제조과정을 단계별로 견학하고, 소비자에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이미 밖에는 증류소 가이드 아저씨가 도착해 있었고, 그는 차 문을 열며 환한 미소로 말했다. “오늘은 긴 하루가 될 거예요. (T'day's gonnae be a lang day, aye.)”
스코틀랜드 특유의 억양이 섞인 영어가 귓가에 스쳤다. 순간 긴장이 살짝 올라왔다. 영어야 어디 가겠나 싶었는데, 스코티시 억양으로 공장 투어를 한다니—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차는 시골의 좁은 길을 따라 달렸다. 소떼와 돌담, 푸른 언덕, 간간이 보이는 오래된 간판과 굴뚝. 길가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간이역 같은 이름의 증류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나의 목적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는 증류라는 방식을 발견한 이후, 마시던 술들의 알코올 도수를 높여왔다.
이는 단순한 맛과 향의 강화에 그치지 않고, 액체의 성질까지 변화시키며 새로운 차원의 술 문화를 만들어냈다. 증류주의 종류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몰트 위스키, 그레인 위스키, 블렌디드 위스키, 보드카, 테킬라, 럼, 버번 위스키, 코냑, 고량주, 브랜디 등… 그 많은 증류주 중에서도 왜 위스키가 유독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걸까? 사람마다 해석은 다르지만, 나는 다섯 가지 이유를 꼽고 싶다.
숙성의 미학
위스키는 오크통에서 수년, 때로는 수십 년을 기다리며 깊은 풍미와 복합적인 향을 만들어낸다. 이 ‘시간의 흔적’이 위스키를 특별하게 만든다.
재료와 제조 공정의 정교함
특히 스코틀랜드 싱글몰트는 보리, 물, 효모만으로 만들어지지만, 결과는 놀랄 만큼 다양하다. 지역, 물, 배치, 숙성통 하나하나가 맛을 좌우한다.
지역성과 브랜드의 헤리티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일본, 미국 등 각 원산지마다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와인처럼 ‘테루아’와 전통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컬렉터블 & 투자 가치
어떤 위스키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오르며, 술을 넘어 예술품이자 자산으로 여겨진다. 한정판, 빈티지 위스키는 경매 시장에서도 고가에 거래된다.
복합적인 향미의 구조
스모키함, 과일향, 바닐라, 견과류, 가죽, 향신료 등 다양한 향이 입체적으로 어우러진다. 단순히 마시는 것을 넘어 감각적인 ‘경험’이 된다.
그래서 위스키는 단지 “술”이 아닌, 시간과 장인의 기술이 빚어낸 “예술”로 여겨진다.
첫 수업은 몰트 위스키의 제조 과정이었다. 한 손엔 노트, 다른 손엔 향을 맡을 준비를 하며 증류소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정적이고 고요했다.
몰팅(Malting) — 보리에 물을 줘서 싹을 틔우는 과정. 효소를 깨워서 당을 만들 준비를 하지.
킬닝(Kilning) — 싹 튼 보리를 열로 말리는 단계. 여기서 스모키 향이 생기기도 해.
밀링(Milling) — 말린 보리를 곱게 분쇄해서 가루를 만든다.
매싱(Mashing) — 이 보리 가루에 뜨거운 물을 섞어 당을 뽑아내는 작업.
발효(Fermentation) — 당이 효모에 의해 알코올로 바뀌는 마법 같은 순간.
증류(Distillation) — 이 술을 끓여서 알코올을 추출하는 단계. 진짜 증류주의 시작.
숙성(Maturation) — 마지막으로 오크통 속에서 몇 년씩 잠들며 향과 맛을 입는다.
직원은 각 과정마다 맡을 수 있는 향, 변화하는 색,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왜 ‘시간’과 ‘기다림’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이건 그냥 술이 아니구나.’
몰트맨(Maltman)의 아침 – 보리에 생명을 불어넣다 보리는 위스키의 뼈대다. 물에 불리고, 바닥에 널어 발아시키는 동안 몰트맨은 끊임없이 보리를 뒤집는다. 고르게 숨 쉬게 하려고. 사람의 손과 시간, 인내가 함께 만드는 첫 시작. 이 보리가 향과 맛을 품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보리길로틴 앞에서, "몰트 품질 테스트는 늘 긴장된다. 작은 반쪽 보리 하나에, 이 증류소의 향기와 맛이 달려 있으니까. 실험실에서는 이 장비를 ‘하프 커널 커터’라 부르지만, 정작 이곳 사람들은 '보리길로틴'이라 부른답니다. 농담 같지만, 누가 어떻게 자르느냐에 따라 다음 배치의 품질이 갈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발아상태를 측정하기 위한 이 분석이야말로 위스키의 일관성과 퀄리티를 보장하는 첫 단추가 된다고 한다.
이스트 투여 순간 – ‘워시백’ 안에서
몰트를 설탕물처럼 만든 ‘워트(Wort)’에 이스트를 넣는 순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거품이 피어오르고, 따뜻하고 눅눅한 공기 속에서 알코올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향기보다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이게 바로 위스키가 숨을 쉬는 시간이다. 이 냄새는 막걸리를 만드는 공장에 가도 비슷한 냄새가 납니다. 다만, 막걸리는 쌀, 여기 위스키는 보리이다.
더 많은 사진들이 있지만, 너무 복잡하게 설명하면 읽기 싫어질 것 같아서 디테일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전문용어는 빼고,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볼게요.
보리를 갈아 만든 죽처럼 된 혼합물에 이스트(효모)를 넣으면 발효가 시작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코올이 생기고, 막걸리처럼 뿌연 상태가 되죠. 이 발효된 액체를 증류기에 넣고 끓이면, 알코올이 먼저 증발하기 시작합니다. 그 증기를 식혀 다시 액체로 만들면, 순도가 높은 알코올이 얻어집니다.
이걸 한 번 더 증류하면 알코올 도수가 더 올라가는데, 일반적으로 두 번째 증류 후의 도수는 약 64.3도 정도입니다. 이 알코올을 오크통에 담아 몇 년간 숙성시키면, 우리가 마시는 위스키가 되는 것이죠.
참고로, 지금 설명한 방식은 전통적인 단식 증류법입니다. 그런데 19세기 초, 아일랜드 출신의 '애니어스 커피(Aeneas Coffey)'가 연속식 증류기를 발명하면서 증류 효율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 장비는 위의 과정을 6번 이상 연속해서 처리할 수 있고, 최종 알코올 도수는 98도까지 올라갑니다.
이렇게 고도수로 만든 알코올은 물로 희석한 뒤, 다양한 몰트 위스키와 블렌딩해서 블렌디드 위스키를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적절한 도수에 도달한 위스키 원액은 이제 오크통에 들어가 인생 2막을 시작합니다. 이 숙성 단계에서 어떤 오크통을 쓰느냐에 따라 위스키의 성격과 가격표가 달라지죠. 말하자면, 어떤 방에서 몇 년을 지내느냐에 따라 사람도 바뀌는 것처럼요.
오크통은 크게 두 가지가 많이 쓰입니다:
미국산 버번 오크통: 버번 위스키를 한 번 숙성하고 난 통. 깔끔하고 단단한 바닐라향이 특징입니다. 깔끔한 룸메이트 스타일.
스페인산 쉐리 오크통: 쉐리 와인을 오랫동안 품고 있던 통. 드라이한 과일향과 깊은 풍미가 스며든 고급진 느낌의 하우스메이트죠.
쉐리통은 특히 인기가 많지만, 문제는... 비쌉니다.
버번 오크통: 약 10만 원
쉐리 오크통: 약 160만 원
버번은 법적으로 오크통을 한 번만 쓰게 되어 있어서, 그 통들이 스코틀랜드로 이민 와서 제2의 인생을 삽니다. “미국에서 은퇴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제2의 커리어 시작한 통들”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보통은 저렴하고 수급도 쉬운 버번통이 주력입니다. 하지만, 쉐리통에서 숙성된 위스키는 복합적인 아로마와 깊은 풍미, 그리고 "있어 보이는 포지셔닝" 덕분에 프리미엄 라인업에 자주 등장하곤 하죠.
결국, 위스키도 사람처럼 어디에서, 누구와, 얼마나 오래 지냈느냐가 그 맛을 결정짓는 셈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오크통도 세월 앞에선 장사 없습니다. 오래되면 새기 시작하거나, 나무가 삭아 위스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죠. 이럴 때 등장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오크통 닥터들, 스코틀랜드에서는
이들을 ‘쿠퍼(Cooper)’라고 부릅니다.
쿠퍼는 단순히 수리만 하는 게 아니라, 오크통을 재조립하고, 불에 그을리고, 다시 숨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장인들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오크통 리모델링 전문가랄까요? 흥미로운 건, Cooper라는 성(last name)이 여기서 유래됐다는 얘기가 있어요. 예전엔 이런 오크통 제작·수리 일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직업이 곧 이름이 된 거죠. 어쨌든, 우리가 마시는 한 잔의 위스키 뒤에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장인들의 손길이 숨어 있는 셈입니다. 쿠퍼 없이 위스키 숙성은 있을 수 없죠. 위스키가 나이 들어 품격을 갖추기 위해선, 좋은 집도 필요하고, 그 집을 제때 손봐줄 기술자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참고로 오크통은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아닙니다. 한 통으로 12년 숙성 위스키를 최대 4번까지 만들 수 있어요. 계산해보면 거의 50년 가까이 함께 가는 파트너인 셈이죠. 이 때문에 증류소 입장에선 30년 이상 오래 숙성시키는 위스키보다, 12년짜리를 여러 번 돌려 만드는 게 훨씬 경제적입니다.
생산 효율 Good
환경에도 Good
회전율까지 Good
결국 우리가 보는 고연령 위스키의 높은 가격은, 꼭 그게 더 맛있어서가 아니라, 기회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기 때문이에요. 30년 동안 창고에서 잠만 잤는데, 팔 시점엔 이미 창고비, 보험료, 인건비, 관리비 등 다 쌓여 있는 상태거든요. 그걸 계산에 안 넣을 수 없죠. 그래서 결론은 이겁니다:
“비싸다고 무조건 맛있는 건 아니다.”
스코틀랜드 현지 바에서도 7년산이면 훌륭하게 마십니다. 12년산만 해도 '오~ 꽤 괜찮은 거 마시네?' 하는 수준이죠. 우리가 흔히 아는 18년, 21년, 30년산은 거의 ‘기념비적 존재’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고연령 위스키를 마신다고 해서 꼭 ‘맛의 신세계’가 펼쳐지는 건 아닙니다. 맛도 결국은 취향, 지갑은 현실. 적당히 즐기면서 마시면, 그게 바로 진짜 위스키 애호가의 자세죠. 그냥 위스키라고 부르는 술과 스카치위스키는 다르다는걸 알고 드셔야 합니다.
스카치 위스키(Scotch Whisky)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합니다:
1. 스코틀랜드에서 생산
2. 최소 3년 이상 스코틀랜드 내에서 오크통에 숙성해야 합니다.
3. 알코올 도수 40% 이상으로 병입
4. 증류 시 알코올 도수가 94.8% 미만이어야 합니다.
5. 원료는 몰트 보리만 사용하거나, 몰트 보리에 다른 곡물(통곡물)을 혼합해 만들어야 합니다.
6. 물과 카라멜 색소 외에 다른 첨가물은 일절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맛있어도, 이 조건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그냥 ‘위스키’일 뿐, ‘스카치’는 아닌 거예요.
그리고 말이죠… 그 오크통을 만드는 쿠퍼(Cooper) 아저씨들, 일당이 장난 아닙니다. 요즘 제가 하는 일에서 받는 일당은 거의 뭐… 애들 껌값 수준이고요. 스코틀랜드에서 초보 쿠퍼가 하루에 200파운드, 요즘 환율로 약 38만 원. 숙련자는 보통은 50만 원도 넘는다고 하더라고요.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술통은 무겁고, 돈은… 쿠퍼가 벌더라고요. 제가 증류소에 있었던 일주일 동안은, 각 파트별로 현지 직원의 보조로 직접 제조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낮엔 땀 흘려 실습, 밤엔 위스키 마시고, 또 마시고, 회사 사람들과 친목도 다지고, 위스키도 다지고(?)… 한 가지 웃긴 점은 이거예요. 한국 술 광고 보면 가끔 이런 말 나오죠? “우리는 물부터 다릅니다.”
그런데요…제가 갔던 그 유명한 위스키 증류소들— 글렌피딕, 발베니, 맥켈란 등등, 전방 2~3km 내에 몰려 있습니다. 똑같은 물 씁니다. 위스키 맛의 차이는 세 가지에서 갈립니다. 보리, 오크통, 그리고 이스트.
피트 향은 그저 ‘개인의 취향’일 뿐이에요. 막상 가보니 놀랐습니다. 보리의 종류, 생각보다 훨씬 다양했고, 오크통의 상태, 하나같이 다 제각각이었고, 이스트도 ‘그냥 넣는 거’가 아니라, 증류소마다 고유의 비밀 병기더군요. 결국 위스키는, 간단히 ‘보리 씻고 물 넣는’ 그런 술이 아닙니다. 정성, 기술, 기다림이 쌓여야 비로소 한 병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제발 부탁인데…
아껴서 드세요. 맥주랑 섞지 말고, 콜라도 넣지 말고, 얼음도 조금만. 가끔은 그냥 원액 그대로, 위스키 장인들의 정성을 혀끝으로 느껴보자고요.
“스코틀랜드의 증류소에서는 날마다 위스키가 증발하며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걸 그들은 ‘Angel’s Share’라 부릅니다. 내게도 그런 일주일이였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 하루, 하루는 어쩌면 나의 천사에게 바치는 몫이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