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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쌤의 spots of time

4. 올래길은 이런 길이었지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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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래길은 보통 집에서 큰 도로가 사이에 난 작은 길을 의미한다. 동네 여기 저기 이어진 작은 길들을 그냥 올래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우리집 주변에도 올래길이 있었다. 돌담을 따라 이어진 길, 그 길에는 철따라 야생꽃이나 수국, 코스모스가 피었다. 봄에는 민들레가 돌담 틈에서 피어나기도 했다. 담쟁이가 돌담따라 올라오기도 했고, 군데군데 강아지풀, 질경이들이 피어있기도 했다. 가을이면 길 한쪽에는 주렁주렁 열린 귤이 돌담 밖으로 삐져나와 아이들의 마음을 시험하기도 했다. 귤 인심이 후해서 아이들이 한 두개 따먹어도 어른들은 이해해 주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올래길로 나왔다. 돌담따라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손 수 만든 작은 눈사람을 올려놓기도 했다.


올래길은 내게 삶은 놀이와 같은 것임을 알려준 길이었다. 그 길에서는 무엇을 해도 재미있었으니 말이다. 지나가는 개미 떼를 보는 것도 놀이였고, 동네 강아지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놀이였다. 나뭇가지 하나 꺾어서 그것으로 땅을 파거나 글자를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자체도 놀이였다. 이때 누군가가 '너는 무엇을 그리고 있니?'라는 질문을 한다면 참 어리석은 질문일 것이다. 무엇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라는 붓이 있었고, 그냥 저절로 떠오르는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올래길에서는 조금 위험해 보여도 나무에 올라가서 먼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스릴 넘치는 놀이였다. 저녁 노을이 질 즘에 밭에서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을 동생과 같이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 자체도 하나의 놀이였다. 동생과 끝말 잇기 놀이를 수없이 했으니 말이다.


올래길은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은 주로 흙길이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면 그 길의 성격과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주로 땅따먹기나 고무줄 놀이를 했다. 그 놀이들은 세상의 다양한 유희를 알기 전에 우리들이 심취했던 놀이였기에 일단 시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었다. 우리가 이렇게 즐겁게 놀고 있는 것을 어른들은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땅따먹기, 고무줄놀이의 절정에 이를 쯤에 어머니께서 들어오라고 부르셨다.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움 마음으로 내일을 기약하고 우리들은 터버터벅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나 내일 다시 이어질 놀이임을 알기에 큰 서운함은 없었다.


올래길은 아이들에게만 중요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어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때로는 농사일의 연장이기도 했고, 때로는 어른들의 카페이기도 했다. 올래길 한 쪽에 큰 아름드리 나무가 있어서 선선하니 그늘 아래서 어른들이 작은 소일거리를 하기에도 좋았다. 부모님은 보리농사 지을때는 보리 깍지, 유채농사 지을때는 유채 깍지를 이 곳에서 바람에 날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잠시 쉴때는 미숫가루나 수박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 어떤 카페에 못지 않은 휴식 장소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이 곳에서 동네분들과 농사일의 근황을 묻기도 하셨다. 키우는 소들은 어떤지, 최근에 태어난 송아지 근황을 묻기도 했다. 지난 태풍에 쓰러진 귤나무들은 어떻게 됐는지, 어떻게 복구할지 등을 걱정하기도 하셨다. 귤 수확기가 되면 어떤 값으로 귤을 팔아야 할지 고민하기도 하셨다. 어른들이 우리집을 방문할 때면 올래길 저 너머에서 부터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OO이 어머니~, OO이 아버지~ 그 소리가 기쁨의 소식인지, 걱정의 소식인지 음성에서부터 짐작이 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집 올래길은 가족과 이웃의 모든 소리를 품은 곳이기도 하다.


큰 도로를 가로질러 우리집 건너편에도 또 다른 올래길이 있었다. 그 올래길은 여러가지 종류의 덤불과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숲길이었다. 이 길은 마을의 고야동산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온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길이었다. 동산 주변에서 소꿉놀이, 총놀이, 연날리기, 눈썰매 타기 등 온갖 놀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산은 바람이 많이 불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킬 수 있는 언덕이었다. 히스클리프가 머물던 언덕, 캐서린에 대한 사랑으로 괴로워했을 언덕 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온갖 사연을 품은 언덕이자 동산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속상한 일들을 풀어 놓기도하고, 각자의 수많은 꿈들을 서로 이야기하기도 했으니, 이 곳은 아이들 각자의 "폭풍의 언덕"이 되도고 남았다.


알다시피 올래길은 큰 도로와 집 사이에 있는 완충지대와 같은 곳이다. 우리 마음속에도 완충지대로 자리잡았다. 올래길을 따라 걸으면서 격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도 하고, 기쁜 마음을 오래오래 서로 나누기도 했으니 말이다. 수많은 화해가 있었고, 수많은 위로가 있었다. 좌절된 꿈에서 다시 일어나 새로운 꿈을 꾸기도 했다. 무엇인가 도전하면서 준비했던 곳, 삶이라는 것도 차근차근 탄탄하게 준비해 가야함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설령 그 길이 아니라면 다시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출발하면 될 뿐이다.


시간이 흘러 내 기억의 올래길에는 책 속의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했다. 책 속의 주인공들과 함께 하니 나의 올래길은 매우 풍성해졌다. 그것은 앤과 다이아나의 자작나무 숲길이 되었고,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토닥토닥 이야기 나누며 걸었던 숲길이 되기도 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가 혼자 걷던 공원길이 되어 가끔은 방황하면서 우왕좌왕 했던 길이기도 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보지 못한 길(The Road not Taken)"처럼 두 갈래 길이 생기기도 했다. 한쪽 길을 선택해 가기로 결심하고는 다른 쪽을 보면서 아쉬워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보면서 말이다. 나의 올래길은 어느새 <월든>의 호숫가 길이 되기도 했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월든 호숫가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때로는 문명에서 벗어나 원시적 놀이의 시작이 되었던 올래길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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