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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쌤의 spots of time

5. 곱딱허다, 곱다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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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삶의 힘이 되는 말이 있다. 나에게 그 말은 "곱다"는 말이다. 얼핏 보면 "예쁘다, 아름답다"의 의미를 지닌 말로만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곱다"의 의미는 우선 '아름답다, 예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 다른 뜻은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얼어서 감각이 없고 놀리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내 어머니의 삶에 가까이 붙어있는 말이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의 8 할이 된 말이기도 하다.


예쁘다의 의미로서의 곱다는 제주 방언으로 "곱딱허다"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주 쓰던 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내게 늘, "곱딱허다" "우리 딸 제일 곱딱허다"는 말을 해 주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이 말을 자주 쓰셨다. 예를 들어, 태풍을 뚫고 흙더미속에서 봉긋 봉긋 솟아난 당근 순을 보면서 말을 하셨다. 힘들게 지은 당근 농사는 발아에서 시작하는데 무더위를 뚫고 파릇파릇 자라고 있는 당근 순이 불어닥친 태풍에 의해 휩쓸리는 경우가 많았다. 흙더미 속에 묻힌 싹이 그 흙을 뚫고 나왔을 때 어머니는 얼마나 그 싹이 반가웠을까. 어머니는 들판에 핀 유채꽃을 보면서도 '곱딱허다'는 말을 하셨다.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든 들판은 누가 봐도 예쁘다는 말이 나오게 돼 있다. 꽃이 지면 유채씨가 영글어간다. 어머니는 수확한 까만 유채씨를 보면서도 '곱딱허다'는 말을 하셨다. 어머니의 노동의 댓가를 어기지 않고 잘 크고 맺어준 유채씨에 대한 보답과도 같은 말 같았다.


봄마다 나를 데리고 자주 가던 고사리 밭, 자락자락 솟아 있는 고사리들을 보면서도 어머니는 '곱딱허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삶에, 어머니의 제주 음식에 고사리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고 고사리에 대한 애착을 알고 있었기에 이때 어머니가 하신 곱다는 말은 어린 나도 인정할 만 했다. 너무 억세게 커지지 않고 봉오리를 다문 고사리를 보면 절로 그런 말이 나온다.


우리집 마당에는 복숭아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복숭아가 열리고 이파리가 하나둘 떨어지면 흙마당이 지저분해진다. 그럴 때마다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었는데, 곱게 쓸린 흙마당을 보면서 어머니는 '곱딱허다'는 말을 하셨다. 빗자루로 쓸고 난 직후 아무도 그 흙마당을 밟지 않은 상태는 아무도 거닐지 않은 태고적 순간과도 같다. 곱게 쓸린 그런 흙마당을 처음 밟으면 대접받는 기분이 든다.


이 외에도 어머니는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발들, 광목으로 만든 갈옷을 볼 때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보면서도, 직접 빨아서 햇빛 좋은 곳에 말리는 운동화를 보면서도 "곱딱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이 몸에 배다 보니 모든 삶이 고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어떻게 곱게 가꾸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기도 했다. 더불어 주변의 사물들, 경험하는 순간들을 곱게 보려고 노력했다. 창밖에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에서 새순이 여물고 있다. 연두빛에서 초록빛으로 싱그럽게 여물어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 곱다. 겨울에 소나무에 살포시 얹어 있는 눈도 그렇게 고울 수 없었지. 한동안 꽃을 못 피우다 어렵게 분홍빛 얼굴을 내민 제라늄 꽃봉오리가 그렇게 고울 수 없다. 남편이 사온 떡, 내 생각이 나서 사왔다는 말이 그렇게 고울 수 없다. 다시 도전해 보겠다는 아이의 말 한마디가 그렇게 고울 수 없다. 사춘기 때 따박따박 대들던 아이, 자는 얼굴을 보면서 참 곱다는 생각을 했었지. 아버지가 마당을 쓸던 기억으로 나는 아파트의 현관을 쓸고 닦고 있으며, 흐드러진 귤꽃을 보면서 곱다고 한 부모님의 말을 떠올리며, 저 멀리 언뜻 언뜻 보이는 베롱나무 꽃을 보며 "곱딱허다"고 읖조린다.


'곱다'에는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얼어서 감각이 없고 놀리기가 어렵다는 뜻이 들어 있다. 부모님은 추운 겨울에 무말랭이 농사를 하셨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부는 날씨에 겨울 무를 수확하여 씻고 기계에 채를 썰어 발에 널어 말리는 아주 고된 일이었다. 봄이나 가을에 하면 안되겠냐고 불평하듯이 여쭈면 무는 겨울에 수확해야 하고 채 썬 무는 겨울 바람에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좋은 상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이때 어머니의 "곱은" 손을 자주 보았다. 힘겨운 노동의 총체적 산물과도 같았다. 나와 동생도 부모님 농사를 거들며 그 힘든 노동의 장면을 직접 봤기에 세월이 흘러 지금에도 그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곱은 손은 어머니의 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동생도 가끔 경험해 보았다. 추운 날씨와 고된 노동에 내 의지대로 펼 수 없는 손...


"곱다"는 말, 그것이 예쁘다는 말이든, 손에 감각이 없다는 말이든, 두가지 의미는 내 삶의 두 축이 되어 삶을 성찰하게 해 준 말이다. "곱딱허다"는 내 삶의 자신감이 되어주는 말이었고, 어머니의 곱은 손처럼 곱다는 말은 삶의 좌절과 절망에서 나를 일으켜준 말이다. "곱딱허다"는 말로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셨으니 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감을 갖고 떳떳하게 설 수 있었으며, 어머니의 고된 노동에서 곱은 손을 봤었기에 좌절되는 순간이 와도 스스로를 일으키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내게 해주신 말로 현재의 나를 살아가는 것처럼, 나 또한 우리 아이들에게 힘을 주는 말을 자주 해주려 한다. 내가 얻었던 힘을 우리 아이들도 똑같이 얻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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