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is the green-eyed monster...
O, beware, my lord, of jealousy;
It is the green-eyed monster which doth mock
The meat it feeds on.
이야고: 질투를 조심해요.
그것은 희생물을 비웃으며 잡아먹는
초록 눈의 괴물이랍니다.
질투는 타인의 행복과 나의 욕망이 충돌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중세에는 질투를 사랑과 덕을 파괴하는 7대 죄악 중의 하나로 보았다. 현대에서 질투는 타인에 대한 인정욕구, 사랑, 소유욕에서 생기며,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 중의 하나이고 인간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감정으로 본다. 셰익스피어에게 질투는 영혼을 파괴시키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간주하며 『오셀로』뿐만 아니라 다른 희곡(예를 들어, 『겨울 이야기』 등)에도 인물들이 의심과 질투로 어떻게 무너지고 파국에 이르게 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질투의 감정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무서운 것인지 셰익스피어는 그것을 초록눈의 괴물로 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 초록색의 괴물일까? 질투하면 담즙이 분비되어 눈이 초록색으로 변한다는 그리스인들의 믿음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초록눈의 괴물은 얼핏 초록색 독약을 연상시킨다. 책이나 영화를 보면 녹색 액체나 연기는 독이나 질병과 연관지어 나온다. 마녀가 큰 항아리에 이런 저런 재료를 넣으며 만드는 독약의 색깔은 주로 초록색이어서 그 무시무시한 푸른 빛은 보는 것 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초록빛의 세기는 그 독약의 치명성을 짐작하게 된다. 예를 들어,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보면 왕비가 부글거리는 초록색 독약에 사과를 담갔다가 빼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성공을 자부하듯 크게 웃는 왕비의 악독한 웃음은 독약의 독성과 치명성에 비례하듯 느껴기도 했다. 초록색은 바로 독약이고, 독약은 바로 죽음이니, 초록색의 무시무시함은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와 결부되어 있다. 셰익스피어가 질투를 "초록눈의 괴물"이라고 한 것은 질투는 결국 사람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죽음에 이르는 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로 오셀로의 질투로 착하고 순수한 데스데모나가 죽고, 이야고의 음모에 그의 아내 에밀리야 또한 살해당한다.
다음 대사에서 이야고는 오셀로에게 의심과 질투를 부추긴다. 그가 말하기 전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점들까지 상기시키면서 의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야고: 부인을, 카시오와 함께 잘 관찰해 보십시오.
눈빛은 질투도 안심도 하지 않으면서요.
전 당신의 순수하고 고귀한 성품이
타고난 관대함 때문에 속임을 당하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 점 유의하십시오....
베니스에서는 여자들이 남편들에게는
감히 보여주지 못하는 못된 짓을
신은 보게 한답니다. 그들의 최고 도덕관은
안하는 게 아니라 안 들키는 거랍니다.
오셀로: 그렇단 말이지?
이야고: 그녀는 당신과 결혼해서 아버지를 속였고
떨리고 무서운 듯한 당신의 표정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오셀로: 그랬었지.
이야고: 아 그럼요,
너무 어린 여자가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 아버지 두 눈을 새까맣게 속여서
그는 그게 마술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제가 크게 잘못했습니다.
당신을 너무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니
겸허하게 용서를 빕니다.
위 대사에서 이야고가 오셀로에게 아내(데스데모나)를 잘 살펴보라고 의심을 부추기는 것은 자신의 아내인 에밀리아를 염두해 둔 말이기도 하다. 이야고는 자신이 원했던 부관 자리를 카시오에게 빼앗긴 것에 불만과 질투를 품었고, 자신의 아내 에밀리아가 오셀로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여 질투를 한다. 이야고는 에밀리아를 이용해 자신의 계략을 실행에 옮기지만, 에밀리아는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거는 강인함과 도덕적 용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이야고의 음모를 폭로하고 결국에는 그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런데 오셀로의 질투는 이야고의 부추김에 의한 것 뿐일까? 오셀로의 질투가 어떤 특징을 지닌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질투의 의미를 좀 더 파헤쳐보자. 질투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는데 보통 자신의 소유나 성취를 누군가에게 뺏길것을 두려워하는 감정의 질투는 jealousy에 가깝고, 자신에게 없고 타인에게 있는 것을 탐하는 감정은 envy이다. 예를 들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에서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에드거의 관계를 질투하며 복수와 집착으로 일생을 태우는데, 히스클리프의 질투는 jealousy에 가깝다. 자신의 캐서린을 뺏겨버린 질투가 그의 감정을 폭풍처럼 사로잡고 만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짜르트의 재능을 부러워하고 질투한 나머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자살하고자 했던 살리에르의 질투는 envy라 할 수 있다. 오셀로의 질투는 어느 쪽일까. 사실 그의 질투는 jealousy와 envy 모두를 포함한다. 왕비 데스데모나가 충직한 부관인 카시오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말하는 이야고의 말을 믿으면서 오셀로는 불같이 화를 낸다. 자신의 소유와 성취를 뺏긴다는 질투(jealousy)가 풍선 부풀듯이 커진다. 의심의 시작은 이아고가 훔쳐온 손수건에서 시작된다. 이아고는 오셀로가 아주 작은 것에도 분노할 듯이 질투하는 성향의 사람임을 알고 이를 이용한 것이다. 오셀로 내면에 질투의 씨앗이 있음을 알고 이를 싹튀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질투를 가만히 보면 열등감에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천민 출신에 나이도 많고 피부도 검은 무어인 장군이었다. 반면에 데스데모나는 신분도 고귀하고 나이도 어리며 하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공주였다. 그녀는 좋은 집안에서 고결하게 자란 품격있는 여인이다. 오셀로는 자신이 갖지 못한 조건의 데스데모나를 부러워했을지도(envy)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아버지를 속이고 자신을 만나러 왔을 때, 그것이 마냥 좋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속이고 자신에게 왔듯이, 그녀가 언제든지 자신을 속이고 다른 애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열등감을 내포한 질투까지 갖고 있었으니, 그의 파국과 비극은 어느 정도 예견이 된다.
톨스토이의『안나 카레니나』에서 카레닌은 아내 안나의 외도를 질투하면서 속을 태운다. 사회적 체면때문에 감정을 억누르기에 그는 더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다. 브론스키와 안나의 관계도 집착과 질투로 얼룩지며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 셰익스피어 비극에서처럼 톨스토이 소설에서도 질투란 감정은 주인공들의 비극에 이르는 원인이 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질투가 모든 비극의 원흉인 것은 아니다. 질투의 실마리는 모두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잘 통제하고 적절히 드러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문학 속에서도 질투는 때로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인물의 성장, 자기 인식, 관계 회복으로 이어지면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하게 기능하기도 한다.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를 한번 보자. 그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위컴)에게 관심을 보이자 질투를 느낀다. 그런데 다아시의 감정은 그를 더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시키고,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도 차츰 회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의 질투는 처음에는 광적인 집착의 감정으로 보였지만, 캐서린에 대한 그의 사랑의 깊이를 헤아리게 되면,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 복합적인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생각해 보니 학창시절, 나를 성장시켜준 것 중에 질투도 한 몫했다. 차분한 말투와 성숙한 사고를 하는 친구를 보면서 부러운 감정을 갖는 동시에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을 하기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또한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을 받고자 했고, 타인에게 인사도 잘하고 배려를 잘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또한 그렇게 되고자 노력했다. 질투를 친구로 삼으면 그것은 더이상 "초록 눈의 괴물"은 아니다.